안방축구/태극기 휘날리며

Good-bye Our Hero, 박지성!

J_Hyun_World 2014. 5. 15. 07:00

 

 

 

  2012년 8월, 영국 맨체스터로 당일치기로 놀러갔을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평소 좋아하던 클럽팀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경기장인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하러 가던 도중, 트램을 갈아타기 위해 어느 정거장에서 환승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맨유, 맨시티 현지팬인 정거장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박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네티즌들이 흔히 구사하는 드립 중 하나였던 'Do you know 박지성?' 이라는 말을 내가 맨체스터 현지에서 하게 될꺼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한 민망한 질문에 대한 맨유 현지팬의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예상답안 이상이었다. 그는 박지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그는 참 좋은 선수였고, 맨유에서 중요한 선수였다. 나는 그가 왜 유나이티드를 떠나 QPR이라는 이상한 팀에 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 면서, "그런 후진 팀에서 박지성이 뛰기엔 그의 클래스가 너무 아깝다. 올드 트래포드의 문은 24시간 언제나 열려있으니,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라." 고 반기겠다고 대답했다.

 

  한 두 시간 후,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하면서 나는 그 맨유 현지팬의 말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맨유 박물관 벽면 한 쪽에 적혀있는 수많은 맨유를 거쳐간 선수들 이름들 사이에 있는 박지성이라는 이름 3글자와 에드윈 반더사르,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와 함께 축구화 등 소장품이 함께 전시되었으며, 맨유 투어를 함께 하던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과 가이드 아저씨의 평조차 박지성에 관하여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정도였다. 절대 내가 언급하는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세계적인 클럽에서 당당하게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축구의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영웅 박지성, 그가 이제 축구화를 벗었다)

 

  약 2년 뒤인 2014년 5월 14일, 21세기 한국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었던 박지성은 선수생활 은퇴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그가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이후 3년 3개월만에 축구화를 벗는 것이다. 사실 박지성이 지금 이 시점에서 은퇴 발표를 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박지성이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날 때만 하더라도 그의 고질병인 무릎 부상으로 얻은 후유증이 원인이었고, 그는 90분 내내 피치 위에서 매경기마다 10km 이상씩 뛸 때에도 그의 양쪽 무릎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은퇴 소식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박지성이라는 존재감은 한국 축구에 있어서 위대함, 그 자체였고 1980년대 '차붐' 차범근 이후로 유럽 전역을 누볐던 슈퍼스타이자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였다. 최근 홍명보 한국 대표팀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시작 전에 박지성과 접촉하여 그에게 태극마크를 달고 한 번만 더 뛰어달라며 부탁했을 정도였으니 이쯤되면 박지성의 위치는 비교불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만 33세이기에 아직 은퇴하기엔 조금 이른 나이이며, 이 나이대에도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40대에 근접, 혹은 그 넘어서도 선수생활을 계속 하는 이들이 국내나 해외에 있지 않던가!). 그러나 박지성의 선택은 "박수칠 때 떠난다" 였다.

 

 

 

'노력형 재능' 박지성이 그동안 걸어왔던 길

 

(박지성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전세계에 널리 퍼지게 된 건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 골일 것이다)

 

  박지성이 전세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던 경기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한반도에서 열렸던 2002년 월드컵 D조 마지막 조별경기 포르투갈전이었다. 후반 중반까지 0대0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그 때, 이영표의 크로스를 박지성은 가슴 트래핑으로 받고 곧바로 오른발로 트래핑한 후, 왼발로 논스톱 슈팅을 만들었고 그것은 포르투갈의 골망을 갈랐다. 박지성의 왼발이 2002년 월드컵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손꼽혔던 거함 포르투갈을 침몰시켰다. 그가 인천 문학에서 이 골을 넣을 때까지, 이정도로 주목받을 것이라곤 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 후 이 21세 청년이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박지성은 유소년 시절부터 모든 이의 주목을 받을만큼의 타고난 재능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초특급 유망주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타입이었다. 수원공고 재학중일 때에 그는 체격이 왜소하여 가벼운 훈련 외에는 별다른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했으며, 대학교 진학 후 국내 프로무대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허정무 前 감독은 자신이 박지성의 재능을 미리 알아보고 국가대표팀으로 발탁했다고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재능을 100% 활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그는 이웃나라인 일본의 2부리그인 J2 리그의 쿄토 퍼플상가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고, 쿄토에서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일본 타지 생활을 하던 도중 파란 눈의 외국인 감독인 거스 히딩크에 의해 월드컵 대표팀으로 발탁되면서 그의 진가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그가 얻은 결과물이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 된 이후 네덜란드 명문클럽인 PSV 아인트호벤과 잉글랜드에서 가장 많은 리그 우승을 기록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때에도, 박지성은 리오넬 메시처럼 화려한 드리블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고, 한 때 팀동료였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처럼 경이적인 득점력을 지니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스 히딩크와 알렉스 퍼거슨이라는 세계적인 명장 두 명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산소탱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90분 내내 뛰어다닐 수 있는 왕성한 활동량과 활동범위, 공을 향한 집중력과 근성, 그리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였다. 박지성은 감독들이 원하는 전술요구에 항상 100% 만족스럽게 수행하였고,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팀을 우선시하면서 플레이했다. 그 결과 '수비형 윙어' 라는 새로운 역할이 탄생하기도 했고, 세계적인 레지스타인 안드레아 피를로가 피치 위에서 지워지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박지성의 클럽 커리어는 단순히 스탯으로만 평가하기엔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유럽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던 모습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승부처가 되었던 이란 원정에서 결정적인 득점을 기록하면서 대한민국에게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안겨다주었고,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선 강호 프랑스와 극적인 무승부를 기록하는 동점골을 뽑아내기도 했다. 4년 뒤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주장완장을 차고 대한민국을 사상 첫 원정 16강전에 올려놓는 1등 공신이 되기도 했다. 특히나 그리스와의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보여줬던 그의 골은 인상적이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꾸준히 월드컵을 나간 그에게 있어 이 정도면, 대한민국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월드컵 커리어를 지녔다(현재 안정환과 함께 아시아선수들 중 월드컵 본선 최다 골 타이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만, 박지성의 국가대표 커리어에 아쉬운 점을 꼽자면, 바로 아시안컵일 것이다. 유일하게 박지성과 인연이 없었던 대회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불참하는 대신에 아시안컵에 출전했지만, 팀은 8강전에서 난적 이란을 만나 3대4로 석패하면서 좌절하였다. 3년 뒤에 열린 2007년 아시안컵에서는 무릎부상으로 시즌아웃이 되면서 출전기회가 무산되었다. 박지성이 없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4강 문턱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치르고도 이라크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또다시 자존심을 구겼다. 4년 뒤, 박지성이 주장완장을 차면서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2011년 아시안컵은 다시 4강전에서 라이벌 일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서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것이 박지성의 커리어에 있어서 유일한 옥의 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Good-bye Our Hero!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이후로 20년 넘게 쉴 틈 없이 달려왔던 박지성은 이제 피치 위를 떠났다. 그의 은퇴 소식에 국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국가들뿐만 아니라 저멀리 유럽에서도 그의 은퇴 소식에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지성을 아시아 No.1 선수라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그의 은퇴소식을 보도했고, PSV 아인트호벤은 자신들의 클럽 홈페이지 메인으로 박지성 은퇴소식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맨유 또한 박지성의 은퇴에 오랫동안 뛰어줘서 고마웠고 행운이 있길 빈다는 반응을 나타냈으며, QPR 또한 박지성의 은퇴소식에 작별인사를 표시했다. 박지성 본인은 자신이 그동안 뛰어왔던 경기를 10점 만점에 7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주위 반응은 이미 10점 만점에 10점이다.

 

  이제 박지성은 5월 24일에 예정되어있는 PSV 아인트호벤 vs 경남과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선수로써의 생활을 마감하고, 자신이 만든 재단인 JS 파운데이션과 함께 자라나는 축구유망주들을 비롯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영웅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2005년 맨유로 이적확정이 난 뒤인 그 해 여름, 박지성이 고향인 수원에 왔을 때 당시 그에게 받은 친필싸인은 내 평생 가보가 될 것이다.

 

Good-bye Our Hero, 박지성!

 

 

다 읽으시고, 밑에 있는 VIEW를 눌러서 추천해주시면 저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