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못지 않게 값진 아시안컵 준우승을 기록한 한국대표팀
(55년만에 아시아 정상에 도전한 슈틸리케호, 아쉽게도 120분을 버티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결승전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번 아시안컵 분위기는 한국대표팀으로 기울어졌었고, 승리의 여신 또한 한국의 손을 들어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개최국인 호주과의 재대결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전반 종료 직전, 호주의 마시모 루옹고에게 게임에서나 볼법한 중거리슛을 허용하면서 대회 첫 실점을 기록하면서 호주에게 리드를 내주었다. 호주로부터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한국대표팀은 후반전 내내 호주 골문을 쉴새없이 두드렸고, 호주 선수들과의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에 손흥민이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한반도는 축제분위기에 휩싸였고, 분위기를 다시 우리쪽으로 가져온 상태에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태극전사들은 역전하기 위해 연장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었고, 호주도 다시 앞서나가기 위해 맞불작전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던 중 연장 전반 종료 직전, 한국 수비의 압박을 버텨낸 토미 주리치가 크로스를 올렸고, 김진현이 펀칭해서 흘러나온 공을 제임스 트로이시가 놓치지 않고 득점에 성공시키면서 2대1로 벌려나갔다. 순식간의 실점이었다.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국대표팀은 사력을 다해 뛰었으나, 뒤집기엔 힘이 너무 부쳤다.
끝내 120분을 버티지 못하고 호주에게 아시아 정상을 내주고 말았다.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15분을 버티지 못해서 날려버렸으니 그에 따라오는 허탈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주리치를 막아내지 못한 김진수와 추가 득점을 성공하지 못한 손흥민은 눈물을 보였다. 그들 뿐만 아니라 머나먼 시드니까지 원정 온 붉은 악마, TV로 결승전 생중계를 시청한 이들 모두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록 결과물은 준우승이지만, 결승전까지 열심히 싸워준 대한민국대표팀 23인 선수들과, 그리고 짧은 시간동안 팀을 추스려 결승무대까지 올라서게 만든 파란 눈의 외국인 감독에게 감사와 수고의 박수를 보냈다. 기대 이상으로 한국대표팀이 선전해서 부끄럽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울리 슈틸리케가 한국 축구팬들에게 가져다 준 선물
(울리 슈틸리케가 지휘봉을 잡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못믿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이들이 신뢰하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을 기점으로 한국대표팀과 대한축구협회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언행불일치로 축구팬들의 비난 표적의 대상이었던 홍명보 전 감독과 월드컵 기간에 있었던 대표팀 행적의 오점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더이상 한국대표팀과 대한축구협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홍명보가 물러난 후, 축구협회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재편성하였고, 이와 맞물려서 새 감독을 데려왔다. 선수시절에 레알 마드리드와 독일 대표팀에서 맹활약했던 울리 슈틸리케가 새 지도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슈틸리케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비록 선수시절은 화려했지만, 지도자로 입문한 이후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경력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슈틸리케 또한 히딩크 이후 실패를 맛보았던 외국인 감독들의 전례를 따를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하지만 3주간 걸쳐 치른 아시안컵이 끝나고, 울리 슈틸리케에 대한 축구팬들의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 단기간에 무너져가던 팀을 새롭게 탈바꿈시켰고, 이를 본 사람들은 슈틸리케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셈이다. 아시안컵 준우승에 머물렀음에도 한국 축구팬들은 그를 향한 신뢰가 상당히 두터워졌는데, 슈틸리케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선물 때문이었다.
1) 월드컵 때 기회받지 못했던, 혹은 진흙 속에 묻혀있던 선수들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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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시안컵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7인. 차두리, 김진수, 김진현, 이정협, 장현수, 남태희, 조영철)
슈틸리케호의 특징을 꼽자면, 가장 먼저 지난 월드컵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혹은 그동안 진흙 속에 묻혀있던 선수들의 활약이다. 차두리, 김진수, 김진현, 이정협, 장현수, 남태희, 조영철 등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차두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과 2011년 아시안컵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대표팀의 핵심선수로 자리잡았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기량하락을 겪으면서 태극마크와는 그동안 인연이 없었고,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는 호출을 받지 못하여 선수가 아닌 방송 해설가로 참가하는 것으로 엔트리 탈락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슈틸리케가 준 마지막 기회에 부응하기 위해 이번 대회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열정적으로 뛰었고, 23인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가장 빛났다. 프랑스 외신에서는 그를 릴리앙 튀랑을 연상케 하는 플레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차두리의 마지막 불꽃은 남달랐다. 자신의 75번째 A매치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지 못하고 국가대표팀을 은퇴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더이상 '차범근의 아들' 이 아닌 '축구선수 차두리'로 기억할 것이다.
차두리 다음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던 선수는 골키퍼인 김진현과 레프트백인 김진수였다. 태극마크와 전혀 인연이 없던 선수들은 아니었지만, 차두리처럼 월드컵 명단에 선발되지 못하고 월드컵 경기를 TV로만 지켜봐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서 두 선수는 자신들이 왜 발탁이 되었는지를 100% 보여주었다. 김진현의 경우, 발기술과 빌드업 능력이 좋기에 강력한 경쟁자로 불렸던 김승규를 제치고 당당하게 이번 대회 주전 골키퍼 장갑을 착용했고, 결승전에 올라갈 때까지 무실점을 유지하는 등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김진현의 활약으로 주전 골키퍼 경쟁은 김진현 vs 김승규 구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시안게임 때부터 뚜렷한 상승세를 보였던 김진수는 이번 아시안컵에서도 맹활약을 펼쳤고, 그동안 이영표가 은퇴한 이후 공석이었던 레프트백 자리를 확실히 메꿔줄 수 있는 차세대 주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히면서 당분간 그를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이동국-김신욱이 부상으로 나란히 최종엔트리에서 빠지면서 가장 걱정이 되었던 공격진이었으나, 이정협의 등장으로 그러한 부분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해소시켰다. 사실 그가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 그의 전 소속팀인 부산 팬들 이외에는 그의 존재를 대부분 몰랐었다. 하지만 A매치 데뷔전이었던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성공시켰고,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도 결승골을 뽑아내는 등 이제 막 태극마크를 단 선수라고는 전혀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데뷔였다. 그는 득점 뿐만 아니라,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수들과 지속적인 경합과 전진 압박으로 상대팀을 괴롭히는 데 능했고, 슈틸리케의 전술에 100% 응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앞으로 그의 성장세에 많은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 외 아시안게임에서 주장 역할을 하였던 장현수와, 홍명보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남태희와 조영철 또한 이번 아시안컵을 계기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2) 감독의 적극적인 의지로 다시 탄생한 '하나의 한국대표팀'
(홍명보가 내건 'one Team, one Spirit' 슬로건을 슈틸리케가 완성시켰다. 사진출처 Newsis)
7개월 전 한국 대표팀이 브라질에서 귀국할 당시,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엿 세례를 받는 등 굴욕 아닌 굴욕을 맛보았다. 'one Team, one Spirit' 슬로건을 내걸었던 대표팀은 하나의 팀이 아닌 하나의 무기력한 집단으로 아무런 의욕도 없었고, 침울함 그 자체였다. 홍명보 전 감독이 취임한 이후, 줄곧 선수 선발 문제 및 논란성 인터뷰 등이 누적되어 있다보니 하나의 정신력으로 단결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였고, 그것이 월드컵 본선무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한마디로 말해 조각조각 분해된 한국대표팀이었다. 홍명보 이후,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거론된 인물들과의 협상도 지지부진했다. 어떤 누구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한국대표팀을 맡겠다고는 무례하고 어이없는 요구조건을 내걸기도 했었다. 이미 히딩크 효과로 외국인 감독에 대한 사람들의 눈높이가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한국대표팀 감독자리가 여론에 쉽게 휘둘리는 특성까지 있었으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누가 와서 이 망가진 팀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 하는 비관적인 여론이 주류였다.
이러한 모든 걱정거리를 감독으로선 무명에 가까웠던 울리 슈틸리케가 해소하였다. 슈틸리케는 부임 초기부터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로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하여 한국 축구팬에게 다가왔다. 아예 한국으로 이사오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한국 대표팀을 끝으로 감독직을 더 이상 맡지 않겠다는 배수진의 자세를 취하면서 사람들로 그의 열정적인 의지가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은 외부 사람이기에 선입견 없이 선수를 뽑을 것임을 선언하였고, 아무리 해외파라 하여도 주전으로 뛰지 않으면 선발하지 안겠다는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굳히면서 이전 감독이 만들었던 논란을 재빨리 잠재웠다. 그리고 언행일치를 위해 그는 K리그 클래식 뿐만 아니라 챌린지 경기까지 보러 다니면서 한국대표팀으로 선발할 선수들을 물색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 일화로 슈틸리케가 안산 경기를 보러 갔을 당시, 누군가가 그에게 안산에서 뛰고 있는 이용래를 국가대표 추천하려고 했었는데 선입견이 생긴다고 하여 조용히 해달라며 당부했다. 지난 11월에는 유소년클럽 축구 챔피언쉽에 참석하여 유소년 선수들에게 축구를 즐기라고 발언하는 등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었다.
슈틸리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 대표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였고, 이번 아시안컵 출전 모토인 'Time For Change(변화하라)'에 아주 걸맞게 변신하였다. 슈틸리케 지도 하에 한국 대표팀은 반 년만에 '하나의 팀(One Team)'으로 굳어졌고, 그 결과물로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애초 우승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확실히 성장했다. 아시안컵이 끝나고 한국대표팀은 부상으로 먼저 귀국한 이청용과 구자철 또한 잊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공을 그들에게도 돌리는 등 '굳건한 의리' 또한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국가대표팀을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감독 한 명의 영향력이 얼마만큼 큰 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3)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솔직히 말해 이번 대표팀은 최정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결승무대까지 올라왔다. 사진출처 OSEN)
한국대표팀은 차, 포 떼고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이동국-김신욱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공격진에 대체 자원이 없다싶을 정도였기에, 과연 이 스쿼드로 제대로 득점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아시안컵 나가기 전까지 슈틸리케는 주전 센터백 라인을 확정짓지 못했다. 겨우 몇 경기만에 주전을 정한다는 게 쉽지 않으며, 매 친선경기마다 다른 선수들을 기용했기에 뒷문 단속 또한 어떻게 할 지도 사실 감이 안오는 게 사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시안컵 대회를 치르는 도중, 조별리그에서 핵심전력인 이청용(오만전 부상)과 구자철(호주전 부상)이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사실상 슈틸리케가 가용할 수 있는 선수마저 2명 줄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한국대표팀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불리한 여건을 유연성있는 전술 운용을 통해서 극복했다.
토너먼트에선 수비가 강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슈틸리케였기에 수비의 불안정함을 기성용과 박주호, 곽태휘 등을 이용하여 해결하였다. 기성용을 스토퍼로 내려서 후방 빌드업을 주도하면서 안정을 가져오거나, 박주호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두어 수비라인 앞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거나, 곽태휘를 위시로 하여 유연성 있는 라인조절을 한 것이 확실히 효과를 보았고, 그 덕에 한국이 결승전 진출할 때까지 무실점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물론 최상의 전력은 아니었으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극대화시켜 승리를 이끌었던 점은 확실히 좋게 평가받을 만하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이정협의 체력이 떨어져 교체해줄 공격수가 없을 때, 곽태휘를 최전방으로 올리면서 호주 선수들과의 공중볼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그가 위치 변경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손흥민이 동점골을 터뜨렸던 것을 본다면, 그는 제 아무리 불리하다고 하더라도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것이다.
몇몇 이들은 슈틸리케를 더러 '운장(運將)'이라고 표현한다. 최적의 라인업도 아닌데, 무실점으로 결승까지 올라간 것은 상당히 행운이 뒤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1988년 결승전 진출 이후, 박종환, 허정무, 조광래 등 수많은 감독들이 도전했지만 결승 문턱도 못갔으며, 오히려 그때 당시 멤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으면 좋았다. 그리고 최상의 전력만 매번 고집했던 일본의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보면, 4경기 내내 똑같은 선발라인업을 내놓았다가 8강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다른 감독들이 못해낸 것을 슈틸리케는 해냈고, 그것을 단지 운장이라고만 평가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임에 분명하다.
이번 아시안컵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대표팀은 다시 올라갈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슈틸리케는 월드컵 때까지 한국대표팀을 맡고 싶다고 일전에 밝힌 바가 있다. 슈틸리케가 지금처럼만 보여준다면, 한국대표팀의 지난 2014년의 악몽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슈틸리케는 다음을 위한 청사진을 이미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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