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축구/독국

다이슬러의 축구선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J_Hyun_World 2011. 1. 23. 04:47

 

 

  메이저 대회 토너먼트의 절대 강자, 독일. 그들은 매번 나올 때마다 그들의 명성에 걸맞는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전세계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3번의 월드컵 우승, 그리고 월드컵 전 대회 통틀어 최하 성적이 16강 진출. 플레이에 걸맞게 그들이 남긴 업적 또한 대단했으며, 이런 위대한 업적을 세우는 동안 수많은 슈퍼스타들도 배출해냈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폭격기' 게르트 뮐러를 시작으로 프리츠 발터, 우베 질러, 로타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올리버 칸, 미하일 발락, 토르스텐 프링스, 미하일슬로프 클로제,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그리고 현재 메수트 외질과 토마스 뮐러, 마르코 마린까지. 이렇게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독일을 볼 때마다 영원히 녹슬지 않는 전차군단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수많은 별들 속에서 강렬하게 빛을 내지 못하고 사라져 간 잊혀져가는 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독일이 낳은 최고의 재능이자 천재, 하지만 부상과 부상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우울증으로 27살에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천재, 세바스챤 다이슬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독일이 낳은 최고의 재능, '천재' 세바스챤 다이슬러.)

 

  독일이 워낙 메이저대회에서 화려한 모습들만 보인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잘나가는 독일도 몇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98년 프랑스월드컵. 1998년 7월 4일은 독일 축구의 전성기 중 몇 안되는 참혹한 장면이었다. 이 날, 1996 유로 챔피언이었던 독일은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3-0 참패를 당했다. 그때까지 훌륭하게 뛰었던 크리스챤 뵈른스가 퇴장당하며 희망이 사라졌고, 수많은 독일 축구 팬들은 우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94년 미국월드컵에 이어 연이어서 두차례나 8강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독일은 세대교체의 실패가 결국 탈락의 요인으로 지목되면서 독일 언론에서도 독일 축구의 위기론이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일 전역이 월드컵 탈락 후유증으로 시끄러웠을 무렵, 1998년 9월 8일, 독일의 외딴 곳에서,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의 세바스챤 다이슬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르면서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다이슬러는 데뷔경기에서 역사가 깊은 뵈켈베르크스타디온을 밟았다(아쉽게도 지금은 철거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6개월 정도가 지난 후였다. 아직까지도 1860뮌헨전에서, 경기 내내 준수한 활약을 한 다이슬러가 60야드를 무아지경으로 드리블한 후, 득점하면서 팀의 2-0 승리를 이끈 장면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드도이치 자이퉁" (Suddeutsche Zeitung)은 이렇게 보도했다: "다이슬러는 1973년, 겐터 네체르가 쾰른과의 결승전에서 득점한 정확한 위치로 공을 차넣었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었다. 겨우 분데스리가에서 11경기만을 뛴 다이슬러는 독일 축구계의 구세주로 주목받았다. 당시 뮌헨글라드바흐의 감독 프리델 라우시는 이렇게 확신했다: "언젠가, 우리는 다이슬러의 이름을 프리츠 발터, 우베 질러, 그리고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같은 맥락으로 부르게 될 겁니다." 국대 감독 에리히 리벡 역시 칭찬 일색이었다: "그는 보석입니다. 팀의 핵심이 될 역량을 지닌 선수며, 고통을 참고 뛰겠다는 정신을 지닌 선수입니다. 독일은 그런 선수가 필요합니다."

 

  다이슬러는 환상적인 첫시즌을 보냈지만,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2부리그로 강등당했다. 이미 유럽의 명문 구단들의 주목을 받고 있던 다이슬러는, 분데스리가에서 17경기만을 뛴 후에 헤르타 베를린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는 식지 않았다. 나중에 다이슬러는 "디 자이트" (Die Zeit)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에게 거는 기대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독일 사람들이 제가 독일 축구의 구세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전 19세, 20세였습니다. 그것도 저 혼자서 말이죠. 미하엘 발락도 있었지만, 그는 저보다 4살이 많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저에겐 정착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이슬러는 그당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너무나 무거운 짐을 줘서 선수로 뛰는 내내 부담감을 느꼈다고 했다.)

 

  헤르타 베를린 소속으로 뛰면서 천재들이 일찍 국가대표에 데뷔하듯이 다이슬러 또한 독일 국가대표에도 서서히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불편해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만큼이나 헤르타 베를린도 준비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무방비로 놔뒀습니다. 전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뛰었지만, 그럴수록 저는 슬펐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광대처럼 말이죠."

 

  다이슬러는 헤르타 베를린에서 뛰는 동안 심각한 무릎부상을 당하며, 2002년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게 그의 불운의 시작이었다. 베를린에서 3년간 부상으로 얼룩진 커리어를 채우는 동안, 수많은 언론에서 거품논란까지 불거져 나올 정도로 심각한 비난 아닌 비난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는 2002년 여름, 독일 최고의 명문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된다. 보통 독일의 특출난 선수라면 바이에른 뮌헨을 거쳐야 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이자 관례처럼 여겨졌고, 다이슬러 입장에서는 최고의 선수들과 발맞출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다이슬러의 바이에른 뮌헨 이적이 확정된 후, 그는 그를 대하던 당시 감독인 디에터 호네스의 대처방식에 대해 크게 실망했었다고 한다.  "호네스는 제가 베를린에서 쫓겨나다시피 가는 걸 팔장 끼고 보기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전 축구에 대한 시각이 변했습니다. 그게 신호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걸 그만둬야겠다'라고 깨달았어야 했는데요." 호네스는 다이슬러가 수많은 비난논란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팀 선수를 감싸주는 팀보스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거였다.

 

 

(독일 최고의 명문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다이슬러. 그는 뮌헨에서 부활의 의지를 불태웠다.)

 

  뮌헨에 도착했을 때, 다이슬러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를 계속해서 괴롭힌 오른쪽 무릎이 다시 파열된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그것이 얼마나 다이슬러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이에른 뮌헨은 다이슬러를 중심으로 팀을 재구성했다. 그는 플레이메이커이자 리더였던 스테판 에펜베르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이 둘은 성격 면에서는 물과 불처럼, 완전 상극이었다.

 

  그리고 2003년, 축구계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불과 23세인 다이슬러가 우울증을 앓고 있어, 선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내 기억으론 뇌진탕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겼다곤 들었는데 확실하진 않다. 정확한 정보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울리 회네스는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다이슬러를 끊임없이 지원했고, 다이슬러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회네스는 언론을 통해 나오는 발언 때문에 호불호가 심하지만, 그는 축구를 이끄는 인사들 중 여전히 축구선수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베켄바우어와 함께 절대적인 존재였다. 다이슬러는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쌓인 기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성장할 시간, 어른이 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 울리 회네스에게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그는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끝까지 믿어줬습니다."

 

  회네스의 무한한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다이슬러는 재활 의지를 불태웠고, 긴 공백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수생활로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2006년 자국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과 바이에른 뮌헨의 우승을 목표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하늘도 무심하던지, 그의 의지를 또다시 꺾게 만들었다. 다이슬러는 팀 훈련 도중에 당시 팀 동료였던 오웬 하그리브스와의 충돌로 인해 또다시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어 2006년 월드컵마저도 출전이 무산되어버렸다(하그리브스가 남을 해치다니... 안믿겨지겠지만 사실이다).

 

 

(다이슬러의 국가대표 은퇴경기, 이탈리아전. 많은 독일팬들이 부상후유증으로 인한 은퇴에 매우 슬퍼했다.)

 

  선수생활의 대부분이 부상으로 얼룩지는 바람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다이슬러는, 그의 전성기였어야 할 2007년 초반에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불과 그의 나이 겨우 27살. 울리 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난 축구 천재였기에,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다이슬러는 현역으로 뛰면서 분데스리가에서는 고작 134경기, 독일 국대에서는 겨우 36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독일 축구의 구세주라고 기대를 받던 자였지만, 부상이 가져온 너무나도 허망한 결말이었다. 무릎과 사타구니의 부상, 그리고 우울증을 겪으면서 다이슬러의 선수생활은 정체되었다. 독일 축구의 구원자는 스스로 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막판에, 전 완전히 지쳤고, 너무나도 늙은 것처럼 느꼈습니다. 더 가고 싶어도, 다리가 갈 수 없게 하더군요." 그에게 남은 건, 자신이 자비없는 프로 축구 세계와는 맞지 않았다는 깨달음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 바이에른 뮌헨에서 다이슬러의 공백은 '프랑스산 페라리' 프랑크 리베리와 '플라잉 더치맨' 아르옌 로벤이 메꿔주고 있고, 국가대표에선 그의 자리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메워주고 있다. 하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 독일의 4강 탈락에서 독일 축구팬들은 '만약 저 경기에 다이슬러가 있었다면, 지진 않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아있을 정도로 아직도 그의 은퇴를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독일 축구팬들은 언제라도 다이슬러가 갑작스럽게 은퇴 번복을 하며 다시 선수로 복귀했으면 좋겠다는 일말의 희망 또한 가지고 있다(쓰다보니 느낀건데 우리나라에선 고종수나 이관우가 이와 비슷한 케이스인 것 같다).

 

  독일이 낳은 최고의 재능, 하지만 신은 그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비운의 천재로 잊혀져 가는 세바스챤 다이슬러. 나도 다이슬러가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고 있다.

 

 

 

출처 : http://www.goal.com/en/news/15/germany/2011/01/20/2313276/germany-unity-series-sebastian-deisler-the-sad-clown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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