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을 보면 볼수록 영원한 독주체제는 없는 것 같고, 약자도 언제나 강자에 의해 희생만 당하는 경우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맨유의 무패행진이 꼴지팀인 울버햄튼에 의해 깨졌던 걸 누가 예상했겠으며, 첼시나 리버풀이 우승권에서 상당히 뒤쳐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나온 김에 오늘은 첼시와 리버풀 이 두 팀에 대하여 다뤄보려고 한다. 첼시, 그리고 리버풀. 2000년대 중반부터 EPL에서 가장 숨막히는 혈전을 수십번 치뤘던 두 팀. 무리뉴vs베니테즈 시절을 시작으로 현재 안첼로티vs달글리쉬 시절까지 이 두 팀이 맞붙을 때에는 언제나 성적을 좌우하는 중요시점이어서 더더욱 손에 땀을 쥐는 명경기를 연출했었다(챔피언스리그에서나 EPL에서나). 그러나 가만보면 이 두 팀도 자세히 해부해보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으면서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는 점! 나는 그 묘하게 닮은 점을 끄집어내보려 한다.
08/09시즌 첼시 vs 10/11시즌 리버풀
1. 여름에 건너온 새로운 감독 (루이스 스콜라리 vs 로이 호지슨)
08/09 시즌 첼시
(브라질과 포르투갈을 이끌며 명장으로 거듭난 스콜라리 감독, 블루스가 되던 그 날)
→ 2008년 여름, 첼시는 아브람 그랜트 감독을 경질시키고 우승청부사로 명성을 날리던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을 스탬포드브릿지로 데려왔다. 2002년 월드컵 우승(브라질), 유로 2004 준우승 + 2006년 월드컵 4강 + 유로 2008 8강(포르투갈) 이라는 굵직굵직한 업적은 그가 첼시 지휘봉을 잡도록 만드는 데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될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첼시 감독으로서 스콜라리는 실패작이었다. 지난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일궈냈던 스쿼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첼시는 빅4와의 경기에서 내리 깨졌고, 선수들과의 의사소통 실패로 인한 불화 조장으로 팀 분위기까지 최악으로 번져갔다. 그러다가 결국, 맨유 원정에서 3대0 완패를 당함으로써 스콜라리는 그 경기 직후 첼시와 이별했다.
10/11 시즌 리버풀
(베니테즈의 뒤를 이어 안필드에 입성한 중위권팀 전문 감독, 로이 호지슨)
→ 2010년 여름, 리버풀은 리그 7위의 굴욕을 안으며 챔피언스리그 진출 실패라는 충격까지 덤으로 안게 되었다. 성적부진의 책임을 안고 베니테즈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안필드를 떠나 무리뉴가 나가고 공석인 인테르로 날아가버렸고, 리버풀 감독으로는 풀햄 감독이었던 로이 호지슨이 오게 되는데, 여기서 호지슨과 스콜라리의 차이점을 꼽자면 바로 커리어. 스콜라리는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면서 월드컵과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걸출한 성적을 냈지만, 호지슨은 풀햄으로 UEFA컵 우승을 들어올렸던 게 전부. 물론 UEFA컵의 격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것 한 번 이뤄냈다는 이유로 더이상 재보지도 않고 질&힉 듀오가 호지슨을 리버풀 감독으로 앉혔다는 걸 꼬집는 것이다. 그래서 첼시와 달리 리버풀팬들은 호지슨의 부임초기부터 달가워하진 않았고, 호지슨은 리버풀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강등권까지 맛보며 리버풀에게 익스트림 스포츠가 무엇인지 선사했다. 이 익스트림 스포츠에 알레르기가 생긴 리버풀 프론트는 더이상 못참고 호지슨과 상호해지를 했다.
2. 팀을 구할 구원투수 등장 (거스 히딩크 vs 케니 달글리쉬)
08/09 시즌 첼시
(첼시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걸 막기위해 로만 구단주는 히딩크라는 히든카드를 뽑아들었다.)
→ 스콜라리 때문에 무너지고 있던 첼시.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했던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첼시를 살려낼 적임자로 평소 친분이 있었던 당시 러시아 국가대표 감독이자, 우리나라 축구계의 영웅인 거스 히딩크 감독을 불러들였다. 이전부터 히딩크의 첼시 링크설은 줄곧 기사가 나왔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첼시가 강팀이라는 이유로 거절해왔던 터였기에 그의 첼시행은 어찌보면 그답지 않은 행동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히딩크는 첼시감독으로 가면서 단지 08/09시즌까지만 임시로 맡는 것이라고 부임 초기부터 못박아두었다. 히딩크가 첼시로 건너간 이후, 첼시는 이전에 비틀비틀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예전에 무리뉴시절의 포스를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첼시를 맡고 나서 첼시의 성적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16승 5무 1패, 리그 3위,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4강(08/09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바르샤를 유일하게 힘 한 번 못쓰게 꼼짝못하도록 만들었던게 첼시였다). 다시 첼시를 살려놓고 히딩크는 떠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안첼로티 감독은 그 첼시를 이끌고 09/10시즌 더블을 달성했다.
10/11 시즌 리버풀
(리버풀은 레전드 '킹케니' 달글리쉬에게 SOS 요청을 보냈다.)
→ 첼시가 히딩크라는 히든카드를 뽑아들었다면, 리버풀은 레전드 '킹케니' 케니 달글리쉬를 선택했다. 리버풀에게 있어 달글리쉬라는 존재는 감독 그 이상의 존재였고, 안필드에선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선수시절에 7,80년대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8,90년대에 감독으로써도 리버풀을 성공가도로 이끌었기에 그보다 더 나은 적합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감독 대행을 맡기 전에 감독현역을 떠난 지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역량이 좀 염려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감독을 맡고 난 뒤, 호지슨이 써왔던 4-4-2를 버리고 경기에 따라 변칙적인 전술을 구사하면서 경기 기복을 줄이는 것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첼시원정에서 1대0 신승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리버풀의 순위는 중위권에서 상위권을 향해 도약했고, 지난주에는 최대 라이벌인 맨유를 안필도 안방에서 3대1로 잡으면서 리버풀을 다시 챔스진출 희망에 한발짝 다가가게 했다.
3. 부진에 늪에서 벗어나다 (플로랑 말루다 vs 하울 메이렐레스)
08/09 시즌 첼시
(방출리스트까지 올라갔던 말루다, 히딩크로 인해 리옹시절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다)
→ 히딩크 체제에 들어서면서 부활의 날개짓을 했던 선수는 누가 뭐래도 바로 '미친왼발' 플로랑 말루다라는 것에 이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말루다는 무리뉴감독이 로벤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했던 선수였으나, 좀처럼 자리잡지 못하고 첼시의 주변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렇게 말루다는 사실상 다음시즌에 방출위기에 놓여있었으나, 히딩크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리옹시절에 보여줬던 왼쪽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드는 돌파능력과 날카로운 왼발킥을 보여주며, 첼시의 부활찬가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고, 후의 첼시의 4-3-3 전술의 한축이 되며 완소로 등극하게 되었다(또한 이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 국가대표 주전으로도 발돋움하게 되었다).
말루다 외에도 히딩크는 그저 신예에 불과했던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를 풀백과 센터백에 번갈아가면서 기용함으로써 그 젊은 세르비아선수를 첼시의 차세대 수비수로 성장시켜놓는 발판까지 만들어놨다. 현재 이바노비치가 첼시 수비진에서 미친존재감을 선보이는 것도 히딩크의 영향이 어느정도 미쳤다는 것이다.
10/11 시즌 리버풀
(메이렐레스가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리버풀도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했다.)
→ 올시즌 리버풀 이적생 중에 가장 주목받던 선수가 포르투갈의 중앙 미드필더인 하울 메이렐레스. 그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주목받았던 것은 유로2008이었다. 통쾌한 중거리슛과 중원장악력이 돋보여서 매 이적시장이 열릴 때마다 명문클럽과 링크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에 리버풀 유니폼을 입으면서 사비 알론소와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빠진 공허한 중원을 메꿔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말루다와의 차이점은 자신의 주포지션이 아닌 윙어로 계속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호지슨이 4-4-2 신봉자인데다가 중원에 제라드-루카스를 배치함으로써 그를 윙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원래 자기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 뛰면 부진하듯이 메이렐레스도 그렇게 부진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감독이 반시즌만에 교체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중앙으로 복귀하자마자 골폭풍을 몰아치며(그의 득점은 주로 중요한 경기에서 터졌다), 리버풀의 핵심선수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4. 전술의 변화 (드록바-아넬카의 공존 성공, 4-3-3의 전환 vs 토레스를 버리고 역동적인 전술로 탈바꿈하다)
08/09 시즌 첼시
→ 그 당시 첼시의 혁명적인 변화로 손꼽혔던 것이 바로 '신이라 불리던 사나이'인 디디에르 드록바와 '정교한 스트라이커' 니콜라스 아넬카의 공존이 드디어 성공했다는 점이다.
사실 스콜라리 체제에 들어서까지 드록바와 아넬카의 공존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잉글랜드 국대에서 제라드와 람파드를 같이 세워놓으면 삐걱거리듯이 드록바와 아넬카가 동시에 선발로 출격하면 시너지 효과가 1+1=2이상이 아니라 1+1=0.5가 되었다. 움직임도 겹치고, 역할분담도 겹쳤었다.
하지만, 그 문제점을 해결한 이도 바로 히딩크였다. 히딩크는 그동안 중원을 강화했던 4-1-3-2 전술을 버리고, 무리뉴 시절에 이용했었던 4-3-3 전술로 회귀했고, 드록바를 최전방에 올려두고 양쪽 윙포워드에 말루다와 아넬카를 배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은 아넬카의 다양성과 말루다의 돌파능력을 이용해보고자 함이었고, 그 예상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또한 4-3-3을 가동하면서 스콜라리 체제에 주로 기용되었던 데코를 벤치로 돌리고, 중원에 람파드-에시앙-발락을 두어 중원을 야금야금 먹어버리는 방법을 택하며 중원점령에 성공했다.
10/11 시즌 리버풀
(토레스를 첼시에 내주고, 달글리쉬는 카윗을 중심으로 역동적인 전술로 탈바꿈하는 데에 성공했다.)
→ 리버풀의 자랑거리라고 하면, 제라드-토레스로 이어지는 제토라인이 유명하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제토라인에 의존하고 있던 리버풀이었기에 둘 중 하나가 부진이나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 맥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연출했었다. 특히, 토레스의 경우에는 원톱에 최적화되어있긴 하지만, 반대로 투톱이나 쓰리톱 등에서 다양한 전술활용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제한적인 게 단점이었다(그래서 스페인 국대에서도 토레스보다 비야를 더 많이 중용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이번 겨울이적시장 막판에 첼시는 고맙게도 토레스를 데려오기 위해 무려 900억원에 육박하는 큰 액수를 지불하며 데려갔고, 리버풀은 그 돈으로 루이스 수아레즈와 앤디 캐롤을 데려오면서 토레스 중심의 전술을 탈피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루이스 수아레즈라는 카드는 리버풀의 역동적인 전술을 더욱 더 극대화 시키는 '기폭제'였다.)
토레스의 전력 이탈은 리버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토레스가 첼시 이적할 때도 이 점을 잠시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토레스가 나가고 나서 달글리쉬는 엄청난 활동량을 자랑하던 카윗을 최전방에 포진하고 메이렐레스가 그 뒤를 받쳐주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왼쪽 풀백 구멍을 글렌 존슨으로 커버함으로써 누수가 막았다. 그리고 겨울에 네덜란드에서 넘어온 수아레즈를 측면과 최전방에 자유분방하게 풀어놓음으로써 리버풀도 맨유역습놀이시절 못지 않는 활동량과 역습을 보여주며, 칼날이 더욱 더 시퍼렇게 섰다(안필드에서 맨유를 3대1로 격파한 점은 리버풀이 예전과 완전 달라졌다는 걸 증명했던 경기였다). 그리고 앤디 캐롤이 부상에서 회복했기에 그의 제공권과 카윗, 수아레즈를 이용한 돌파능력과 활동량, 뒤에서 메이렐레스의 저격까지 갖춤으로써 리버풀은 새로운 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5. 시즌 성적표 (리그 3위, 챔스 4강, FA컵 우승 vs ?)
08/09 시즌 첼시
(무관으로 끝날뻔 했던 첼시가 FA컵 우승을 거머쥐면서 블루스는 다음시즌의 불꽃을 살려나갔다)
→ 히딩크 감독은 이미 맨유와의 격차가 벌어진 것을 인정하며 일찌감치 리그 우승을 포기하고 챔스와 FA컵에 주력했다. 하나를 포기했기에 마음에 편해진 것일까? 첼시는 전보다 더 가벼운 몸놀림과 활기찬 경기력을 보여줬고, 리그 연승과 동시에 아스날을 4대1로 격파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유벤투스, 리버풀을 잡아냄으로써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만약 이니에스타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지 않았고 심판이 판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첼시는 챔스 결승전에서 맨유와의 리벤지 매치를 벌였을 뻔 했겠지...). 그리고 FA컵 결승전에서 깔끔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챔스 4강에서 불운의 탈락으로 땅바닥에 떨어졌었던 첼시의 사기를 어느덧 우승팀 못지 않게 하늘을 찌르게 만들었다.
10/11 시즌 리버풀
→ 호지슨이 경질당할 당시에 리버풀의 순위는 11위였다. 그러나 리그테이블에서 리버풀은 눈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6위까지 치고 올라와 최소 유로파리그 진출권 안에 들어와있다. 이미 리그컵이나 FA컵은 일찌감치 탈락했기 때문에 그들이 집중할 수 있는 건 남은 리그 일정 마무리와 유로파리그다. 리그 우승도 이미 멀어졌기에 리버풀은 오히려 유로파컵에 올인하게 된다면, 우승까지 가능할 것이다. 현재 리버풀은 유로파리그 16강에 안착한 상태이다. 비록, 1차전인 브라가 원정에서 1대0으로 패하긴 했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2차전이 홈경기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진출할 가능성은 높다. 리그도 잘만하면 챔스리그 티켓을 따낼 수 있다. 4위인 첼시와의 승점차가 9점차라 크겠지만, 첼시나 토트넘에 비해 일정이 그나마 수월한 편이기에 막판에 가서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꾸준한 모습을 계속 유지한다면 뒤집기는 언제든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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