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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移籍)? 이적(離籍)! 팬들과 그렇고 그렇지 못한 사이의 선수들 시리즈

J_Hyun_World 2011. 9. 3. 08:00

 

 

 

  이적(移籍) : 운동선수가 소속팀에서 다른 팀으로 옮기는 일. 영어로는 Transfer라고도 한다.

 

  운동선수로써 '이적'이라는 이 단어는 보통 침체기에 빠져 입지가 줄어든 선수가 쫓겨나 다른 팀에서 새롭게 도모하는 경우나, 아니면 해당 팀에서 잘나가는 선수가 더 성장하기 위해 좀 더 큰 물에서 놀기 위해 팀이나 리그를 옮기려는 경우, 이렇게 크게 2가지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스포츠계에서 이적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며, 특히 축구계에서만큼 이렇게 흔하게 사용하는 곳도 드물다. FIFA의 규모가 UN이나 IOC보다 훨씬 더 방대하기 때문에 선수 이적은 실시간으로 전세계적 범위에서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적을 통해 A팀은 환호성을 지르고, B팀은 급우울과 분노 등 온갖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선수 몸값 금액에 따라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한다. 모두가 win-win이면 좋겠지만, 100% 그렇지는 않다는 게 현재다.

 

  이적(離籍) : 예전 구민법에서 호주가 가족을 호적에서 떼어내는 일. 즉, 한마디로 호적에서 파내 가족의 신분을 박탈하는 일이다.

 

  이러한 이적과정 속에서 우리는 해당 선수를 이적(離籍)해버리기도 한다. 그만큼 팬들의 뒤통수를 심하게 후려쳐버린 나머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그 선수에게 느끼는 배신감이나 섭섭함을 현재까지도 줄곧 이어가기도 한다. 나는 이 시점에서 이적으로 인해 팬들과 그렇고 그렇지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선수들 시리즈를 한 번 간략하게나마 소개해보고자 한다.

 

 

 

1. 내가 너네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 포항 vs 박주영, 그리고 오범석 

 

  2000년대 초반, 당시 대한축구협회에서 우리나라 최우수 유망주들을 선발하여 해외 선진축구기술을 배워오기 위하여 일명 "우수선수해외유학 프로젝트"가 처음 가동되는 시점이었다(참고로 이 프로젝트의 1기 이전의 프로토타입은 설기현이었다). 축협에서 이러한 프로젝트를 가동하다보니 포항과 울산, 전남을 필두로 한 몇몇 K리그 팀들이 별도로 자기네들이 직접 자신들의 촉망받는 유망주들을 유학보내는 시스템을 시행하였다. 포항은 그 당시 브라질로 1년 유학보냈는데, 그 브라질 유학원정대에 선발된 선수가 현재 포항의 프렌차이즈 스타인 황진성을 비롯하여, 이번에 아스날로 이적한 박주영(당시 청구고), 오범석(수원), 그리고 김동현(범죄자)였다.

 

  박주영은 포항제철공고를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다니던 대구 청구고등학교가 당시 포항의 지원을 받던 학교였고, 고등학교 시절에 청구고를 이끌며 일약스타로 주목받던 박주영은 포항의 유학시스템을 통하여 브라질의 기술을 몸소 익히고 오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포항이 박주영에게 공짜로 무료봉사를 한건 아니다. 박주영이 브라질 1년 무료 유학을 가는 조건으로 박주영이 K리그로 진출할 시, 포항과 "우선협상조건"을 걸었으며, 이를 어길시에 유학비 5천만원을 반납하는 게 조건이었다. 브라질 유학을 다녀온 포철공고출신인 황진성과 오범석은 곧바로 포항과 프로계약을 맺었고, 김동현은 유학비 5천만원도 갚지도 않은 채, 포항을 등지고 수원으로 향했다(김동현 이놈은 이 때부터 이놈의 싹수가 보였구나...참고로 아직도 안갚았다던데...).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건 바로 박주영의 케이스였다. 박주영은 브라질 유학을 다녀온 후, 프로전향하기 보단 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상황이었다. 그가 졸업 후 곧바로 협상하길 원했던 포항이었기에 박주영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었고, 박주영은 고려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포항은 말그대로 우선협상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 진학한 이후에도 계속 박주영과 협상하여 자신의 선수로 만들기 원했으나 박주영은 쉽사리 계약하려 들지 않았고, 때마침 서울이 박주영에게 접근하였다. 박주영은 우선협상권을 가진 포항을 제쳐두고 서울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서울로 입단하기 전에 이미 서울의 모기업 계약사 광고를 몇차례 찍으면서 사실상 서울 이적이 확정되었고, 박주영은 유학비 5천만원을 포항에게 반납하면서 사실상 종료되었다. 박주영이 김동현과 달리 양심적으로 유학비 5천만원을 되돌려줬기 때문에 아무문제 없이 끝났지만, 포항 팬들은 두고두고 서울 유니폼을 입은 박주영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감추질 못했고, 박주영의 여파로 인해 포항은 즉시 청구고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다(청구고 후배들은 자신들의 축구부가 망한 게 다 박주영탓이라고 뒷담화를 하고 있다). 요새 포항과 서울이 맞붙는 경기를 '박주영 더비'라고 심심찮게 부르는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래도 박주영은 오범석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었다. 박주영은 포항에 입단하지 않았고, 그리고 5천만원도 다 돌려줬으니까. 오범석, 당시 포항에서 각광받는 차세대 에이스이자,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매김하였고, 2004년 포항이 리그 준우승을 거둘 때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세웠다고 해도 뻥이 아니다(이건 진실이다). 파리아스 감독 체제에서도 오범석의 비중은 매우 돋보였다.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하는 오른쪽 풀백은 물론이겠거니와 중앙미드필더, 심지어는 오른쪽 윙어로도 가뿐히 소화하면서 파리아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항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범석이 구단에 이적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범석의 이적요구는 포항 구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는 핵심전력이었고, 무엇보다도 핵심선수를 철천지원수인 울산 같은 팀에게 절대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이적은 절대불가였기 때문에 포항은 오범석을 해외로 이적시켜주겠다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오범석은 2007년 하필이면 J리그의  강등권에 분류되어있는 요코하마 FC로 임대를 떠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김진규처럼 일본 임대를 갔다가 수도권팀으로 이적하려는 움직임이 강했었다. 오범석이 일본으로 가 있는 동안, 파리아스 감독은 인천에서 최효진을 데려와서 그를 최고의 오른쪽 풀백으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오범석의 공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포항은 그 해 리그 우승과 FA컵 준우승을 차지하였다(이 발판으로 최효진의 주가는 더더욱 치솟았다). 이렇게 최효진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기에 포항은 오범석을 그가 원하는 대로 수도권 팀으로 이적시키기 위해 성남과 트레이드 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오범석은 돌연 성남행이 아닌 러시아 진출이라는 포항구단을 제대로 뒤통수 치는 행동을 보였다.

 

  오범석도 자신이 성남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미니홈피에 한 선수가 수도권 팀으로 가게된 걸 축하한다는 일촌평을 남기기까지 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오범석의 에이전트는 이미 성남행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리그의 FC 사마라라는 팀과 접촉하여 구두계약을 맺은 후, 오범석이 러시아로 진출하게 될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를 수차례 뿌렸다. 그리고 사마라측에서 포항구단에게 협의의향서까지 보냈으니 포항 입장에선 뒤통수를 너무 세게 맞아서 정신이 얼얼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포항은 사마라 이적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FIFA에 공식 제소할 것이라며 강경하게 나오면서 엄청난 대립 구도를 보였고, 우여곡절 끝에 오범석은 성남이 아닌 러시아로 날아가게 되면서 성남과 포항을 제대로 물먹였고, 포항팬들은 오범석을 "비열한 배신자"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그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오범석의 활약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여름, 돌연 K리그로 돌아올 것이라는 루머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면서 오범석이 성남으로 갈 것이라는 의견이 꽤나 지배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범석이 국내 리턴의 거점으로 삼은 구단이 다름 아닌 포항과 가장 사이가 안좋은 최대라이벌인 울산이었다. 가뜩이나 두 번의 이적파동으로 오범석이라는 이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포항팬들이었는데 그가 울산으로 이적했으니, 포항이라는 호적에서 오범석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파내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후에 오범석은 울산팬들까지 물먹이면서 올시즌에 수원으로 이적했다.

 

 

 

2. 그들은 "좋은 배신자"였습니다 : 울산 vs 신홍기와 이상호

 

  누가 포항의 라이벌 아니랄까봐, 울산도 이러한 배신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울산의 경우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울산이 지금의 문수경기장이 아닌 당시 공설운동장을 홈경기로 쓰던 시절이었다. 그때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본인은 울산의 홈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저녁 경기를 보러갔었다. 그당시 울산의 스쿼드는 꽤나 화려했다. 1996년 고재욱 감독 체제로 울산이 처음으로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직후였기 때문에 우승멤버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당시 울산에서 '신'급으로 분류받던 울산이 자랑하는 프렌차이즈 스타인 '가물치' 김현석을 비롯하여 작은 체구에 빠른 돌파로 상대 수비를 휘젓던 정정수, 그때도 상당히 돋보였던 수문장 김병지, 그리고 당시 '꽃미남'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유비' 유상철(전 형님한테 꽂쳤었다구요 ㅠㅠ)... 그때 당시만 생각해도 정말 화려한 기억이었다.

 

  그 중에서 왼쪽 풀백으로 나오던 신홍기의 활약도 상당했다. 거의 울산의 프렌차이즈급으로 간주되었고,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을 비집고 들어오는 오버래핑 능력이나 수비능력은 정말이지 끝내줬고, 중요한 경기때마다 터지는 골은 울산 현대자동차 및 중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우리 아버지를 비롯)을 더욱 더 술독에 빠뜨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홍기의 끈기가 정말 대단했다. 90분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끝까지 공을 향한 집착과 경기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 근성. 지금 돌이켜보면 참 멋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현대에 근무하시는 아저씨들의 저녁을 한방에 잡쳐버리는 사태가 왔으니 바로 신홍기의 수원으로의 이적이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1998년부터 당시 팀 창단 3년차였던 수원이 본격적으로 정상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이동국-안정환과 함께 K리그 트로이카로 군림하면서 '앙팡테러블'로 불렸던 K리그 최고의 왼발 고종수와 우승청부사로 불렸던 사샤, 악동으로 상벌위원회까지 넘나들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가히 최고의 용병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던 데니스, 그리고 캐논슈터 이기형, 수원의 아들이라 불려도 무방한 박건하, 거미손 이운재, 게다가 명장 김호 감독까지... 이러한 마지막 퍼즐로 울산의 핵심이었던 신홍기가 돌연 이적해버렸기에 울산은 분노를, 그리고 수원은 환호하는 극과극의 반응이 나왔다(우리 아버지는 그거땜에 한동안 신홍기 보면 욕했었다는..).

 

  신홍기는 2001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울산팬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샀다. 1999년부터 주장완장을 차면서 다른 경기에서도 기복없이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유독 울산전만 되면 다른 수원선수들보다 몇배는 더 열정적으로 뛰고, 친정팀에 대한 자비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거 없었다. 게다가 항상 1대1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면 언제나 결승골은 신홍기의 발에서 나온다. 이러니 울산 사람들이 신홍기를 좋아할까? 내 기억 속에서도 신홍기는 거의 '유다'와 동급이다.  이러한 사태는 10년이 지난 뒤에 또다시 반복되었다. 10년 전처럼 울산의 프렌차이즈 스타가 똑같이 사고를 친 것이다. 바로 이진호와 함께 울산의 아들로 불렸다가 하루아침에 '좋은 배신자'가 되버린 이상호다. 

 

(난 아직도 왜 이상호가 울산에서 떠나겠다고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대체 뭐 때문에?)

 

  이상호. 당시 울산의 아시아깡패시절에 이천수-마차도-최성국의 뒤를 잇는 또하나의 재능이자 울산이 내노라하는 빛나는 울산 현대고 출신 유스다. 울산에서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그에게 붙었던 별명은 '울산 박주영', 혹은 '포스트 박지성'으로 불렸다. 박주영 이래로 최고의 재능으로 분류되었던 이상호였고, 당연히 2007년 청소년대표팀에서도 주축은 이상호였다. 2006년 데뷔부터 울산에서 파격적인 데뷔를 선보였던 이상호는 2007년 9월 29일, 수원전에서 멀티골까지 기록하면서 사실상 울산의 차기 에이스로 굳혀지면서 이천수-최성국의 빈자리를 그가 이제 채우나 했다.

 

  하지만, 그러한 처용의 설렘도 잠시, 2009년 초. 이상호는 뜬금없이 울산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2008년 말부터 이상호가 J리그로 진출한다는 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며, 그 이적설이 울산 팬들을 심하게 흔들었다. 이천수는 다시 유럽으로 떠났고, 최성국도 성남으로 이적해버린 마당에 울산에 이제 믿을만한 공격자원은 사실상 이상호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깐 말이다. 결국 J리그행은 무산되었고, 울산의 동계훈련은 철저히 이상호를 전술에 중심에 두고 한 훈련으로 계속 나갔다. 그러나 울산과의 재계약협상에서 이상호의 태도는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이었고,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9년 2월, 수원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이 갑작스레 퍼지기 시작했고, 울산은 그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김정남 감독 후임으로 온 호로곤씨가 이상호를 잡기 위해 직접 설득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상호는 울산의 간절한 부탁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수원으로 가버렸다. 이적료 없이 FA로.

 

  그렇게 수원으로 쉽게 떠나버린 울산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10년 전에도 울산의 스타였던 신홍기가 수원으로 떠났었던 때를 다시 한 번 재연하는 듯 했다('이거 평행이론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었다). 수원에 입단한 이상호는 입단한 지 얼마 채 되지 않아, 친정팀이자 자신을 키워준 울산을 향하여 어처구니없는 디스를 작렬했다(신홍기도 이정도까진 아니었다).

 

"울산은 나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이 말 한 마디에 나는 한 순간에 '이상호빠'에서 '이상호까'로 아주 쉽게 돌아서버렸다(지금은 그때보다 감정이 덜하지만, 아직도 이상호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여전히 '배신자'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울산팬들 대부분이 느꼈던 분노였다. 이상호 이적문제로 인하여 울산과 수원 팬들의 충돌이 거세게 이뤄졌고, 서로에 대한 비난을 넘어 상대방을 향한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2009년, 2010년 울산과 수원이 맞붙은 경기를 보면 울산이 유독 수원을 상대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이상호 이적파동이 울산에게 엄청난 투쟁심을 불어넣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호도 다른 경기에선 미친듯이 펄펄 날뛰어도 울산전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아마 울산 처용의 분노의 기세에 억눌린 게 아닐까 싶다. 지난 라운드에서 울산 문수경기장에서 쏟아진 이상호에 대한 야유는 부부젤라 빙의한 듯했다.

 

 

 

3. 해외로 야반도주해서 뒤통수 친 그대들 : 수원 vs 조재진과 김남일

 

  그렇다고 해서 수원이라고 마냥 울산으로부터 신홍기나 이상호 등을 영입하면서 마냥 환호성을 질렀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해당 몇몇 선수들에게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조재진과 김남일.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수원을 버리고 해외로 야반도주한 것으로 모자라, 그렇게 좋은 대접을 해줬던 수원을 비롯한 K리그 전체를 디스하는 이른바 '팀킬'을 선보였다.

 

  먼저 조재진의 경우, 당시 수원 소속이었으나 워낙 그당시 수원의 포스가 막강했고(주전선수 한 명 한 명이 그저 갈락티코였다), 그에 비해 신인 조재진의 활약은 미비했기에 큰 존재감이 없어 2002년에 상무 입대를 결정했다. 그리고 상무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자주 기용되면서 그의 입지 및 기량이 점차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하였고,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의 눈에 띄어 A매치 데뷔까지 누리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수원에서 쭈구리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백조가 된 셈이다. 그렇게 자신감이 한껏 붙었던 조재진은 2004년 수원으로 복귀했지만, 수원에 돌아와서는 상무 때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수원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가 싶었는데, 기어코 제대로 찍히는 사건이 터졌다.

 

  때는 2004년,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이전한 서울과의 첫 경기. 그 날 수원과 서울은 전투를 방불케할 정도로 상당히 거친 경기였는데(수원과 서울이 맞붙을 때에는 양 팀 선수들이나 서포터즈들 분위기가... 말 안해도 다 아는 사실...), 유독 조재진의 행동이 수원팬들에게  심하게 거슬렸던 것이다. 조재진은 이날 경기에서 자신의 팀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냉정히 외면하더니, 상대팀이자 자신과 절친한 선수인 김동진이 쓰러진 것을 보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달려와 웃으면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평소 일반 경기였으면 그의 태도는 문제 없었겠지만, 수원과 서울이 맞붙는다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그의 행동은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켜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수원이 1대0으로 패배하고 심지어 수원의 어떤 선수는 분함을 감추지 못해 눈물을 흘렸는데, 조재진은 혼자서 싱글벙글 웃으며 경기장을 나갔다. 그랑블루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상태였다.

 

  그렇게 수원에서 겨우 4경기 1골 밖에 기록하지 못했던 조재진은 2005년 J리그의 시미즈 S-펄스에 입단하게 되었는데,

입단하고나서 한다는 소리가 "수원은 나랑 맞지 않았다. 내가 수원에게 이적료를 안겨줬으니 수원은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이다"라는 거의 망조에 가까운 인터뷰를 남김으로써 수원팬들은 더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그때부터 수원과 조재진 사이의 감정은 극악에 치닫게 되었고, 후에 조재진이 전북으로 입단하게 되면서 사건이 또다시 터졌다. 전주성에서 조재진의 골로 전북이 수원에게 1대0으로 앞서나가고 있을때, 이때다 싶어 그랑블루는 조재진을 향하여 백지영의 "두번 다시~ 사랑 안해~"를 부르며 조재진을 향하여 콜을 했다(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조재진이 당시 백지영과 열애설 났다는걸..). 그 노래를 듣던 조재진은 홧김에 그랑블루를 향하여 감자를 날렸다.

 

(전북이 한시즌 밖에 뛰지 않은 조재진을 위해 은퇴식을 마련해주었다. 반면 4년간 뛴 수원에게 그는 배신자로 찍혔다)

 

  조재진 못지 않게 김남일도 수원의 뒤통수를 상당히 후려쳤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 의해 발굴된 한국산 홀딩 미드필더이자, 이천수-최태욱-김정우와 함께 막강한 인천 부평고출신의 핵심축. 지단에게 부상입혔을 때 자신의 연봉에서 까라는 거침없는 모습과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터프함과 활동량, 그리고 상대를 중원에서 완전 지워버리는 1대1 마크 능력 및 전방으로 찔러주는 전진패스능력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홀딩 미드필더류였다. 게다가 외모또한 수려하여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도 역시 박지성-이영표-송종국과 함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문을 두드렸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여 해외진출의 실패를 맛본 채, 전남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전남에서 차츰 폼을 끌어올리다가 2005년 차범근 감독에 의해 수원의 푸른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차범근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예전 2002년 한일월드컵시절의 김남일로 재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장완장을 차면서 수원의 중원을 이끌어갔고, 수원에서 보여준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워드컵 엔트리에 뽑히며, 한국대표팀의 중원을 책임졌다. 여기까진 좋았다. 2007년까지 수원에서 보여준 김남일의 활약이나 태도 등은 전혀 문제삼을 만한 게 없었다.

 

(K리그에서 터프함과 의리있는 것으로 유명했던 김남일, 하지만 그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소에 터프한 이미지 답게 의리파로 소문났던 김남일. 하지만, 그는 수원과의 의리를 저버리면서 하루아침에 배신자로 전락하게 되어버렸는데, 바로 그의 일본으로 출국했던 것이 이 사건의 시발점이다. 2008년 초, 당시 김남일은 스포츠 헤르니아 부상(우리말로 탈장, 카카가 이거땜에 꽤나 고생했었다)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일본으로 출국하게 되었는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수원은 김남일의 부상회복이 더욱 빨라지도록 하기 위해서 치료비용까지 구단에서 전적으로 지불하였다. 허나 언론에서는 이미 김남일이 일본 클럽과 계약한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었고, 2007년을 끝으로 FA로 풀린 김남일은 "나는 수원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며 일본행 루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자신의 충성심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충성은 거짓 충성으로 드러났고,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사를 데리고 일본클럽과 계약하는 데 이용하며 결국 그는 빗셀 고베에 입단하였다. 또한 수원에서 있었던 행사에서도 가장 소극적으로 임했던 김남일이 일본에서 "K리그의 마케팅이 소극적이다.'느니, "K리그가 그러면 안된다느니"라며 K리그를 디스하면서 배신의 아이콘 "김배신"으로 등극하던 순간이었다(이야~ 진짜 뻔뻔함의 끝판왕이다).

 

  그렇게 수원을 비롯하여 한국축구팬의 뒤통수를 심하게 후려친 김남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톰스크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소속팀인 톰스크와의 임금체불문제로 러시아에 남았다. 그 후 임금체불문제를 해결하고 FA신분으로 중동리그에 진출하려고 했으나, 막판 협상이 결렬되어 현재 톰스크에 잔류하고 있는 상태며, 인천이 김남일을 데려오려고 한다고 한다. 인천 입장에서는 필요한 전력이 되겠지만, 과연 수원을 비롯하여 대부분 K리그 팬들이 그를 곱게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내 느낌이다.

 

 

 

4. 너 참 마음에 안든다, 니가 어떻게 그러냐 : 전북 vs 염기훈, 그리고 임상협 

 

  1년 밖에 뛰지 않았던 조재진을 레전드로 추대하여 은퇴식을 시켜줬던 전북 모터스. 그들이 진정 대인배라는 칭찬도 듣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고, 특정 선수 때문에 꽤나 속앓이를 하고 있다. 지금도 해당선수들에 대해선 여전하다. 포항이나 울산, 수원의 케이스에 비해서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 볼 수 있겠지만, 전북 입장에선 나름 심각하고 쟤들이 상당히 미워보인다. 바로 염기훈과 임상협이다.

 

(2006년 좌기훈-우형범으로 아시아 무대를 쓸고 다녔던 염기훈의 까까중머리 시절)

 

  염기훈이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현재 전북의 감독인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전북에 입단하고 나서 염기훈은 특별한 것 없던 공격력에 형편없는 수비라는 혹평을 받으면서 대학시절과 달리 전력 외로 분류되고 있었다. 허나, 염기훈은 자신의 문제점인 수비력을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노력의 땀방울은 최강희 감독이 염기훈을 다시 기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염기훈은 다시 찾아온 기회를 두 손 꽉 잡은 채 놓치 않았다. 2006년, 염기훈은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첫해에 6골을 기록하면서 K리그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좌기훈-우형범이라는 전북의 최고 측면라인업을 구축하면서 아시아깡패 울산을 아챔 4강에서 잡고, 아챔 우승을 이뤄내는 신화를 써냈다.

 

  그러한 활약에 힘입어 염기훈은 K리그 신인상에 이어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겹경사까지 터졌다. K리그 신인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나 다름이 없었고, 마치 특권과도 같았다. 그는 A매치 무대 데뷔에 이어 2007 아시안컵 대표팀 엔트리에도 떡하니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영광이 연달아 그에게 터지게 되다보니 염기훈 또한 오해와 루머 속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오른발 종족 피로골절로 부상명단에 올라가 있던 무렵, K리그 이적시장에서는 염기훈이 수원으로 이적할 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루머가 단순성 소문에 그치지 않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게 되자, 구단은 염기훈이 '기껏 성공하니까 우리의 믿음을 저버린다.'는 일종의 괘씸함이 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빚어나온 염기훈과 전북 구단 상호 간에 발생한 오해와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러한 오해에 대하여 염기훈은 해명할 기회도 없이 구단에 의하여 전북에서 울산으로 정경호와 1대1 강제 트레이드되어버렸다. 울산으로 이적하고 나서도 그에 대한 오해는 쉽게 풀려지지 않고 오히려 마일리지처럼 누적되어갔다. 잦은 부상으로 인해 울산 전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계륵으로 평가받던 염기훈은 2009년 1월, 울산의 동의없이 EPL의 웨스트브롬위치로 입단테스트를 받으러 가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선수'로 제대로 낙인찍혀버렸다. 이렇게 낙인찍혔으니 전북팬들에게 있어 염기훈은 그저 '자기 밖에 모르는 놈'이 되어버렸다.

 

(부산에선 꽃미남 아이돌이지만, 전북에선 슬슬 밉상이미지로 바뀌고 있는 임상협)

 

  염기훈과 전북의 사이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임상협이 전북팬들에게 은근~히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9년에 드래프트 제도를 통하여 전북에 입단한 임상협은 2년간 전북에서 뛰면서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지 못하며(2시즌 동안 총 19경기 출장, 1골 기록), 올해 초에 부산과의 2대2 트레이드 대상에 오르면서 전북을 떠나 부산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임상협에게 있어서 이 2대2 트레이드는 절호의 찬스이자, 자신의 입지를 제대로 다지게 된 발판이 되었다.

 

  부산으로 이적하고 나서 한상운, 김창수, 양동현 등과 함께 주가를 올리면서 안익수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임상협. 다른 경기에서도 어떻게든 골을 집어넣는 모습을 보이곤 한데, 전북전에서는 다른 경기 때와 달리 더 거칠고 도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임상협에게 그리 나쁜 감정이 없던 전북 팬들에게 점점~ 밉상이 되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이적 후에 그가 했던 인터뷰를 되새김질해본다면 대충 내용이 이러했다.

 

"전북에 있을때는 항상 경기에 나가지 못해 포기하고 있었다." "전북의 훈련은 너무 프리하게 한다."

 

  여태 다른 디스식의 인터뷰에 비하면 상당히 겸손하고 일반적인 인터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와중에서 은근슬쩍 전북의 신경을 살살 긁고 있으니 전북팬들도 "아, 임상협 아오...ㅋㅋ" 이런식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팬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지만, 그가 앞으로 전북을 상대로 임하는 자세가 어떤지에 따라 원수가 될 지, 애증의 관계가 될 지...

 

 

P.S : 이 글의 의도는 절대로 선수를 디스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진 글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게 없는 지 찾아보기 위해서 포스팅 한 것이니 돌을 던지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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