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축구/잉글국

잉글랜드에 불어닥친 등번호 9번의 잔혹사

J_Hyun_World 2011. 12. 15. 08:00

 

 

  사실 축구에 있어서 등번호 9번이라는 의미는 그 팀에서 득점을 책임지는 스코어러, 즉, 골을 잘 넣는 스트라이커(일명 피니셔)에게 9번을 배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흔히 잘 아는 등번호 9번을 달고 뛰었던 선수들로는 브라질 축구의 한획을 그었던 '호돈신' 호나우두를 비롯하여, 쓰나미도 피해가는 위치선정을 지닌 이탈리아의 필리포 인자기, 잉글랜드의 살아있는 전설인 앨런 쉬어러, '바티골'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이 있다. 현대축구에서는 이제 더이상 등번호에 크게 부여하지 않고 선수들의 개개인 선호도에 따라 등번호를 각기 배분하기에 각 번호의 의미에 크게 두지 않긴 하나, 아직도 등번호 9번을 달고 뛰는 선수들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있다(아무래도 호나우두의 여파가 큰 탓일 것이다).

 

  현대축구에서 더이상 등번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일까. 언제부턴가 등번호 9번을 달고 뛰는 스트라이커들의 존재감이 호나우두 이후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날두나 메시만 하더라도 그들의 등번호는 7번이나 10번이지, 9번이 아닐뿐더러 그 외 요즘 잘나가는 선수들 중에서 9번을 달고 뛰는 슈퍼스타는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잉글랜드 프리미엄리그의 경우에는 등번호 9번을 달고 뛰는 선수들이 마치 약속한마냥 동반부진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9번 선수 잔혹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올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엄리그에 불어닥치고 있는 '9번 잔혹사'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리그 득점왕에서 4번째 옵션으로 추락해버린 베르바토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유로 이적한 뒤, 베르바토프는 단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받질 못했다 사진출처 스포탈코리아)

 

  2006년 여름, 바이엘 레버쿠젠에서 토트넘으로 넘어와 주장이었던 로비 킨과 함께 환상의 콤비를 이룰 때만 하더라도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에겐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그의 우아한 플레이에 열광하는 팬들도 상당히 많았다(토트넘 팬들은 그를 마치 종교처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하지만, 그가 2008년 여름 이적시장 막판에 맨유로 이적한 것이 도리어 그의 커리어에서 하향곡선으로 돌아서버린 계기가 되어버렸다. 2008년 호날두-루니 등을 앞세워 다이나믹한 플레이를 추구하던 맨유 전술에 있어 활동량이 적은 베르바토프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한순간에 먹튀로 전락하며 벤치멤버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 호날두와 테베즈가 이적한 뒤, 루니 중심으로 개편된 맨유 전술에서도 베르바토프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며, 매시즌마다 나오는 살생부 리스트에 한 번도 벗어나질 못했다. 지난시즌 리그 득점왕을 차지할 때도 그랬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음에도(그것이 맨유 우승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베르바토프는 치차리토에게 주전을 빼앗기며 맨유의 3번째 공격수로 밀려버렸고, 챔스 결승전에서도 선택받지 못했다. 올시즌은 더더욱 심했다. 임대생활을 마친 대니 웰벡까지 맨유 1군에 합류함으로 인해 그는 오웬과 함께 컵대회용 공격수로 젊은 선수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며 자존심을 구길 대로 구기고 있다.

 

  현재 주전경쟁 라이벌인 치차리토가 부상당하여 빨라도 1월에 돌아오는 상황이기에 베르바토프에게 출전기회가 주어질 줄 알았으나, 현재 퍼거슨 감독의 선택은 루니의 원톱 체제 혹은 웰벡과 투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리그 득점왕이 한 시즌만에 이러한 푸대접을 받다니, 베르바토프만큼 9번 잔혹사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선수가 누가 있으려나?

 

 

 

2. 거품 이적료로 인한 부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토레스(첼시), 그리고 캐롤(리버풀)

 

(900억이라는 족쇄에서 페르난도 토레스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시즌 초반에 드록바의 부진과 함께 스트라이커 부재를 겪고 있던 첼시는 2011년 겨울 이적시장 막판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페르난도 토레스를 리버풀로부터 900억원이라는 엄청난 이적료를 지불하였고, 덕분에 토레스는 역대 EPL 선수이적료 1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적료가 너무나 큰 가격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첼시와 토레스의 스타일이 전혀 맞지 않아서였을까. 그는 남은 시즌동안 단 한 골에 그치는 수모를 겪으면서 2010/2011 시즌 EPL 최악의 먹튀 1위까지 등극하는 오점을 남기면서 2010년 월드컵 우승 이후로 불운한 나날을 겪기 시작했다(심지어 그가 첼시로 이적하고 난 다음인 첼시vs리버풀전에서 첼시 유니폼을 입은 토레스는 리버풀이 이기는 것을 구경해야만 했다).

 

  안첼로티에서 비야스-보아스 체제로 바뀐 이후엔 토레스는 그의 전술에 부합하기 위해 리버풀 때 모습과는 다른 스타일로 변모하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물인지 초반에는 비야스-보아스의 전술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드록바를 제치고 선발로 나오기 시작했다. 맨유전에서 골을 넣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제 토레스가 다시 부활하여 첼시의 선봉장이 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맨유전에서 찾아온 두번째 기회를 곧바로 날려버림으로써 첼시팬들은 다시 충격에 휩싸였고, 토레스도 그 삽질 때문에 다시 추락해버렸다. 게다가 그동안 부진을 겪던 드록바가 차츰차츰 깨어나기 시작하니 이제 토레스는 다른 팀으로의 이적설까지 불거져나오고 있다.

 

(토레스 못지 않게 앤디 캐롤도 리버풀에서 징하게 안풀리고 있다)

 

  페르난도 토레스의 공백을 대체하기 위해 첼시에게서 받은 900억원 중에서 뉴캐슬에게 620억을 지불하여 곧바로 데려온 앤디 캐롤. 뉴캐슬에서 뛸 때만 하더라도 앤디 캐롤은 포스트 앨런 쉬어러로 불리면서 카펠로 감독에 의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까지 데뷔하면서 루니와 환상의 호흡을 이룰 것이라 잉글랜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리버풀에서는 뉴캐슬에서 뛸 떄와는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상입은 채로 리버풀로 이적했기 때문에 리버풀에서 데뷔하는 데 있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콥스들은 부상중인 캐롤을 굳이 그 금액으로 데려왔어야했냐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하여 본격적으로 필드를 밟기 시작했으나, 리버풀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전술은 뉴캐슬 시절 때와는 달리 공중볼을 따내는 헤더타겟 역할을 부여하였다. 캐롤이 190cm에 육박하는 신체조건을 갖췄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헤딩에 능한 타입은 아니었고, 오히려 발밑에 능숙했던 스트라이커였다(마치 울산의 김신욱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익숙치 않은 전술적 움직임에 맞추는 데에 크게 애먹고 있는데다가 그를 돕는 도우미들(스튜어트 다우닝) 또한 캐롤과 전혀 호흡이 맞지 않아서 캐롤은 더더욱 부침을 겪게 되면서 뉴캐슬 시절 그 과감한 모습과는 달리 점점 더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620억원이라는 몸값은 캐롤의 목을 조여 올 정도로 부담감을 심어주고 있다.

 

 

 2010/11시즌 최악의 먹튀 BEST3 중에서 올시즌에 그 오명을 씻고 날아다니는 선수로는 오직 맨시티의 에딘 제코 밖에 없다. 토레스와 캐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 이적료와 압박은 언제까지 따라올 지... 이 압박을 끊어내는 것이 이 두 선수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3. 주전경쟁상대의 맹활약 때문에 못나오는 박주영(아스날)과 파블류첸코(토트넘)

 

(아스날 진출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던 박주영, 그러나 반페르시 때문에 매일 먹구름이다)

 

  박지성에 이어 박주영이 EPL 빅클럽팀 중 하나인 아스날 이적 확정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언론은 온통 축제분위기였고, 박지성이 그러했듯이 박주영 또한 아스날에서 곧바로 출전기회를 잡아 아스날에서 데뷔무대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스날의 저주번호인 등번호 9번을 배번받을 때에도 박주영이 그 징크스를 깰 껏이라고 한국 축구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아르센 벵거 감독 또한 박주영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이슈가 되었던 8월말이 지나고 난 현재 시점에 보았을 때, 박주영은 아스날에서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하루하루가 먹구름이고 이제 그가 리그에서 데뷔무대를 갖는 것에 대해서 축구팬들조차 거의 포기한 상태며 다른 팀으로 임대가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박주영이 아스날에서 거의 벤치만 달구거나 혹은 출전명단에서 제외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작용하는데, 첫번째는 아스날 주장인 로빈 반페르시가 올시즌 최절정의 기량을 보이면서 리그 득점왕과 함께 팀 상승세의 주역에 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박주영과 반페르시 투톱을 가동시키기엔 4-4-2에 적합한 중앙미드필더가 아스날에 없다는 점이다. 현재 아스날은 4-3-3에 최적화되어있고 벵거 감독 또한 4-3-3을 줄기차게 고집하고 있기에, 원톱으로 나오는 반페르시가 부상으로 결장하지 않는 한 박주영에게 기회가 전혀 돌아갈 리가 없다는 것이다. 박지성과 달리 병역에 그리 자유롭지 박주영의 입장에선 아스날 이적은 일종의 큰 모험을 한 것인데, 아르센 벵거감독은 그런걸 전혀 모르고 있으니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박주영은 토트넘의 로만 파블류첸코에 비하면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박주영은 첫시즌이기에 아직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토트넘의 로만 파블류첸코와 비교해본다면 그나마 상황이 훨씬 낫다. 토트넘에서 맨유로 이적한 베르바토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파블류첸코는 2008년 여름에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서 건너왔다. 토트넘으로 건너오기 전, 파블류첸코는 유로2008에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 국가대표의 스트라이커였으며, 특히나 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 선제골을 꽂아넣으면서 빅클럽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등 아르샤빈과 함께 다른 유럽 클럽들이 탐내던 선수였다. 그랬던 그는, 토트넘에 건너와서 러시아 국가대표때처럼 해줄 거라 기대했지만, 그러한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고, 파블류첸코는 한시즌당 5골도 겨우겨우 넘기며 계륵이 되어버렸다.

 

  파블류첸코를 비롯하여 기존의 토트넘 공격수들의 득점력이 빈곤했고(팀내 최다득점자인 반더바르트의 득점이 토트넘 공격수들이 골 넣은 횟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전술적으로 유연하질 못했기에 토트넘은 맨체스터 시티에서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임대해왔으며, 이것은 파블류첸코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아데바요르는 적응기간 없이 곧바로 토트넘에 녹아들었고, 아데바요르의 장기 중 하나인 뛰어난 연계플레이 덕분에 반더바르트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부진하던 저메인 데포까지 살아나면서 파블류첸코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기 시작했다. 토트넘에서 4시즌째에 접어들면서 불만이 갈 수록 쌓이는 파블류첸코에게 있어 북런던의 겨울은 더욱 더 가혹하기만 하다.

 

 

  북런던 클럽에서 뛰고 있는 이 9번 선수들은 이번 박싱데이부터 기회를 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아직 불확실하다. 그나마 박주영의 경우에는 제르비뉴와 샤막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차출로 인해 뛸 수 없기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파블류첸코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이 다섯명의 '9번 선수'들의 잔혹사는 현재까지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다섯 선수에게 다시 주전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다섯 명 다 똑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물론, 기회를 잡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며, 운 또한 따라줘야 할 것이다). 2011년의 9번 잔혹사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과연 이들은 올시즌이 끝나기 전에 잔혹사가 아닌 해피엔딩으로 마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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