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명경기였던 스페인 vs 이탈리아, 1대1 무승부로 끝나긴 했지만, 양 팀 다 그 어느경기보다 매우 질 높은 경기력을 뽐냈다)
역시 전통 강호 팀끼리의 대결이어서 그랬던가. 이번 유로 2012의 또하나의 죽음의 조인 C조 빅매치였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기는 90분 종료휘슬이 울릴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 경기의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승부는 1대1 무승부로 끝나긴 했지만, 경기 내용면에서는 이번 대회 최고의 명경기를 보여줬다. 이탈리아는 이번 경기결과를 통해 스페인을 상대로 국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기록을 계속 이어간 반면에, 스페인은 후반 막판에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을 것이다. 이 두 팀이 비긴 덕분에 앞으로 이 두 팀이 상대해야할 크로아티아와 아일랜드전의 비중이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제로톱으로 승부한 스페인 vs 변형적인 쓰리백을 들고 나온 이탈리아
(사진 출처 KBSN SPORTS)
스페인과 이탈리아 양 팀은 전문가들이 예측한 포메이션을 완전히 뒤집은 전술로 이끌고 나왔다. 스페인은 기존 4-2-3-1 전술을 활용하였으나, 이탈리아전을 맞이하여 갑작스레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최전방으로 내세운 일명 제로톱 전술을 들고 나왔고, 체사레 프란델리 체제 이후 줄곧 4-3-1-2에 초점을 맞춰서 이탈리아식 티키타카 전술을 활용해왔던 이탈리아는 스페인과의 결전을 앞두고 데로시를 센터백으로 기용하는 등 갑자기 쓰리백으로 전환하여 3-5-2 전술로 들고 나왔다. 양 팀이 이렇게 전술을 들고 나온 이유는 나름 양 팀 다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스페인이 제로톱으로 나온 이유는 아무래도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스페인의 주축 스트라이커인 다비드 비야가 지난 클럽월드컵 대회에서 입은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점이 그의 소속팀인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스페인국가대표팀에게 까지 영향이 미쳤고, 비야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스페인 공격진의 무게감은 확연히 떨어졌고,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은 심히 걱정에 빠졌다. 이번시즌 좋은 활약을 보였었던 로베르트 솔다도나 아드리안은 최종명단에서 탈락했고, 그 대신 올시즌 부진을 겪었던 페르난도 토레스나 알바로 네그레도가 뽑히면서 델보스케의 선수선발논란은 더욱 더 가중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로톱을 택한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능력이었다. 파브레가스의 경우 올시즌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아스날에서 뛰었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리오넬 메시와 함께 제로톱 역할을 수행하면서 올시즌 개인 통산 한시즌 최다골을 뽑아내는 등 물오른 득점감각을 선보였다. 그리고 최전방 스트라이커 역할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 밑으로 내려와서 다른 미드필더들과의 끊임없는 연계플레이를 만들면서 전방으로 침투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제로톱 전술을 택했던 것이다(참고로 파브레가스가 U-17 시절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이탈리아도 스페인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카테나치오의 상징과도 같던 포백을 과감하게 버리고 쓰리백을 택했던 것은 요근래에 프란델리식의 4-3-1-2 티키타카 전술이 통하지 않았던 점이 매우 컸다. 스페인과의 유로 첫경기를 치르기 이전에 벌어졌던 3차례의 A매치 경기에서 내리 3연패를 당한 것도 모잘라 심지어 무득점 패배를 겪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특히나, 이 때 마지오가 오버래핑을 할 당시 뒷공간이 철저히 공략당하면서 이탈리아가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었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프란델리는 점유율 축구를 과감하게 버리고 보누치-키엘리니 센터백 라인에 수비능력이 뛰어난 미드필더인 다니엘레 데로시를 센터백으로 내리는 극단적인 처방전을 내렸다. 한가지 추가할 점이 있다면, 이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된 도메니코 크리시토의 공백도 상당부분 작용했다. 여태껏 카사니(마지오)와 함께 양쪽 측면에서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상대의 측면을 공략해왔던 크리시토가 빠지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공격적인 오버래핑이 상대적으로 반감되고 그 뒷공간 커버가 힘들어지다보니 수비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전반전 : 아코디언처럼 유연하게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를 막아서는 데 성공했던 이탈리아
(전반전 :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를 마치 아코디언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유연하게 틀어막아버린 이탈리아의 전술이 완벽히 먹혀들었다)
전반전에 양 팀 득점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점유율 부분에선 스페인이 약간 앞섰고 패스성공횟수도 스페인이 훨씬 압도적이긴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전반전에는 이탈리아의 전술적 승리라고 평가하고 싶다. 기존의 스페인의 경기력을 비교하자면 스페인은 평소 상대팀에 비해 압도적인 점유율로 우위를 점했어야 했지만, 전반전에 스페인 대 이탈리아의 점유율은 57대43으로 생각보다 스페인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점유율 부분에서 그렇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었고, 특히나 전반 30분 이전까지 양 팀의 점유율은 50대50으로 완전 비등했었다(역시 메이저대회에서 한 번도 스페인에게 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위엄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전반전에 돋보였던 이탈리아의 끊임없는 수비라인의 변화는 참으로 예술이었다. 보누치-데로시-키엘리니의 기존의 쓰리백을 형성하면서 수비의 중심축을 잡은 채, 양쪽 측면을 담당하는 마지오-지아케리니가 수시로 수비와 공격을 왔다갔다하면서 스페인을 카테나치오라는 그물에 쉽사리 담기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공격시에 이탈리아는 쓰리백으로 나섰다가 수비시로 돌아서면 이탈리아는 파이브백으로 늘리면서 스페인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으면서 그들을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전반전 경기를 보면 이탈리아는 전체적으로 촘촘하게 서면서 스페인의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배하였다). 제로톱인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예측력이 뛰어난 다니엘레 데로시로 하여금 철저하게 봉쇄하였고, 측면에 빠져있는 이니에스타나 다비드 실바의 경우 1차적으로 마지오나 지아케리니로 막아서며, 1차 방어선이 뚫릴 것을 방지하여 보누치-키엘리니라는 2차 방어선으로 겹겹이 둘러쌓다. 또한 이탈리아 중원에 배치된 미드필더 3명(마르키시오-피를로-티아고 모따) 또한 왕성한 활동량으로 사비와 알론소의 패스를 묶어내고 전방에 빠져있는 카사노에게 원터치 다이렉트 패스를 발사하는 등 빠른 역습을 전개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아코디언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수비진 때문에 스페인은 전반전에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탈리아 중원의 왕성한 활동량 때문에 사비나 알론소, 부스케츠는 패스하면서 차지할 공간이 일정 제한되는 바람에 전진패스가 힘들었고, 실바나 이니에스타가 측면에서 막혀버리는 바람에 중앙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그들이 중앙으로 들어오게 되면 자연스레 이탈리아의 수비진, 그리고 중원과 충돌하게 되면서 공간창출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되는 셈이다). 특히나 다비드 실바의 경우에는 엠마누엘레 지아케리니에게 완전히 지워졌던 한 판이었다. 거기다가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데로시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제로톱 전술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후반전 : 양 팀의 신의 한 수 돋는 교체카드 활용, 그제서야 살아난 스페인
('D의 의지' '우디네세의 중년가장' 안토니오 디나탈레가 그동안 국가대표에서 부진했던 모습을 스페인전에서 씻어냈다. 사진출처 스포츠조선)
전반전에 양 팀 득점없이 끝나다보니 후반전에 돌입하고 나서 양 팀은 좀 더 공격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수비진을 끌어내려서 스페인에게 빈틈을 주지 않는 대신에 수비라인을 끌어올려서 스페인을 오프사이드 트랩에 빠뜨리는 방법을 택했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체력을 좀 더 빼앗기 위해서 더 많은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체력이 빠지길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에, 차사레 프란델리 감독은 오늘 영 활약이 없었던 마리오 발로텔리를 빼고 침투능력과 순간스피드가 발군인 안토니오 디나탈레를 투입하는 교체술을 선보였고, 그것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안드레아 피를로의 허를 찌르는 킬패스는 곧장 스페인 선수들 사이를 가로질러 디나탈레에게 연결되었고, 카시야스와 1대1 찬스를 맞이한 디나탈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골을 성공시키며 팽팽한 균형을 먼저 깨뜨렸다. 특히나, 디나탈레의 이 골은 그동안 아주리군단의 일원으로써 국제대회에서 매번 활약이 없었던 자신의 부진을 한 번에 씻어내는 한 방이었다.
선제골을 헌납했던 게 크게 자극이 되었던 지, 이 골을 계기로 스페인이 다시 각잡고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디나탈레의 골에 대한 화답이라도 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킹모드였던 다비드 실바가 순간적인 킬패스를 찔러주었고, 데로시와 순간 놓친 틈을 타 파브레가스가 쇄도하면서 동점골을 뽑아냈다(흔히 바르샤에서 볼 법한 세스크의 모습이었다). 이탈리아가 후반전 내내 수비를 너무 전진배치를 하다보니 스페인에게 순간적으로 공간을 허용해준 셈이다. 그 이후, 델보스케 감독은 부진했던 다비드 실바를 빼고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헤수스 나바스를 투입시키면서 지아케리니가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 왼쪽 측면을 철저히 공략하기 시작했고, 나바스의 폭발적인 스피드는 지아케리니를 빨리 지치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이탈리아 수비의 틈이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한쪽이 열리기 시작하니 반대편에 있던 이니에스타도 동서분주하면서 이탈리아 수비진을 끊임없이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양 팀 감독이 교체카드로 하나 더 뽑아든 지오빈코와 토레스 카드도 제법 적절한 투입이었다. 지오빈코의 경우에는 디나탈레에게 순간적으로 찔러준 로빙킬패스 말곤 딱히 보여준 것은 없을 지도 모르나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스페인 수비가 여러명이 붙는 등 스페인 수비진을 유인하는 미끼로 나름 괜찮은 활약을 했다. 토레스의 경우에는 숱한 찬스를 전부 골로 연결짓지 못한 2% 부족함이 있긴 했지만, 체력저하로 허덕이는 이탈리아 수비의 뒷공간을 끊임없이 노리면서 역습을 주도하였다. 이후 이탈리아가 체력이 떨어지고 나니 스페인의 일방적인 공세가 이어졌으나, 이탈리아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1대1 평행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경기 리뷰 :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를 공략하는 데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이탈리아
그동안 바르셀로나 혹은 스페인의 축구로 대변되는 점유율 축구를 공략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방법들이 나왔다. 그 중에 약 팀들이 주로 하는 전술은 10백을 돌리는 극단적인 수비전술로 아예 처음부터 바르셀로나에게 틈을 내주지 않는 방법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세 무리뉴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로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면서 수비형 미드필더 세명을 배치하는 일명 '트리보테'를 들고 나와서 해당 키플레이어들을 철저히 삼각형 공간 속에 가두는 방법을 보여주곤 했었다. 아니면, 상당히 거친 경기를 보이면서 점유율을 방해하여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극단적인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 이외에 이탈리아는 또다른 방법으로 점유율 축구를 공략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는 유기적으로 수비숫자를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하면서 수적싸움에서 스페인에게 밀리지 않는 방법을 택하였다. 동시에 점유율/패싱 축구가 아니더라도 길고 묵직한 다이렉트 롱패스 하나로도 충분히 상대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카사노라는 크랙이 이러한 점유율 축구를 깨드리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지 또한 보여주기도 했다(카사노와 발로텔리 둘 다 서로가 좀 더 연게플레이가 더 좋았더라면 이 경기 결과는 어찌되었을 지 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레 데로시를 센터백으로 투입하여 예측력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일차적으로 저지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보여주었다(마치 레알 마드리드에서 센터백이었던 페페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렸던 것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프란델리 감독의 전술적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만약 이탈리아의 이 전술이 완성단계가 된다면 현대축구의 대세라고 일컫는 점유율/패스 축구도 힘을 잃을 지도 모른다(단, 이탈리아처럼 쓰리백을 가동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번 유로2012에서 이탈리아가 보여준 이러한 대항법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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