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준우승팀의 유로대회 조별 광탈 징크스
모든 스포츠에는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징크스Jinx)란 재수 없고 불길한 현상에 대한 인과 관계적 믿음을 이른다. 이러한 징크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내려오는 집단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있다. 집단의 구성원은 일반적으로 집단의 징크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대회, 그리고 모든 팀, 그리고 선수들마다 제각각 징크스를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번 유로대회에서도 징크스는 많이 가지고 있다. 가령, 이탈리아의 크로아티아전 무승 징크스라던지, 프랑스의 지단+플라티니 없을 때 1승도 못거둔다는 징크스라던지, 잉글랜드의 스웨덴전 무승 징크스라던지 찾아보면 징크스가 상당히 많다. 허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징크스가 하나 있긴 한데, 그것이 바로 "월드컵 준우승팀의 유로대회 조별 광탈 징크스"다. 이러한 징크스의 시작은 1994년 미국월드컵 준우승팀이었던 이탈리아가 유로96에서 조별리그 탈락할 때부터 시작했다.
1) 유로96 - 이탈리아(1994년 월드컵 준우승 팀)
(94년 미국월드컵 때 브라질과 승부차기까지 갈만큼 막강한 전력을 보여줬던 이탈리아, 하지만 2년 뒤에 거짓말처럼 유로대회에서 광탈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하면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한만큼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 바로 결승전에서 PK 실축 후 눈물을 보였던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인 로베르토 바죠의 모습이었다. 비록 우승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이탈리아의 행보도 널리 주목받았다. 그리고 2년 뒤, 바죠가 빠진 이탈리아는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안젤로 디리비오, 프란체스코 졸라, 로베르토 도나도니 등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들과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등 차세대 이탈리아의 재목으로 불렸던 신예들이 합류하여 적절한 신구조화를 이룬 이탈리아 대표팀이었다. 첫경기인 러시아를 상대로 2대1로 이길 때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 라운드인 체코와의 경기에서 2대1로 패했고 조별리그 마지막 라운드인 독일과 득점없이 0대0으로 비기면서 골득실차로 체코에게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것이 월드컵 준우승팀의 유로대회 징크스의 시초가 될 줄 그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2) 유로 2004 - 독일(2002년 월드컵 준우승팀)
('녹슨 전차'라는 오명을 쓰고도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낸 독일, 하지만 2년 뒤 유로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을 겪으면서 독일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그로부터 8년 뒤, 그동안 잠잠했던 월드컵 준우승팀의 유로대회 징크스가 다시 살아났다(유로 2000의 경우에는 당시 1998년 월드컵 준우승팀이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역시 토너먼트의 강자답게 독일은 세대교체에 실패한 '녹슨전차'는 오명과 달리 월드컵 준우승을 거두면서 독일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정확히 2년 뒤에 유로대회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네덜란드, 체코와 함께 죽음의 조에 걸린 독일은 라이벌인 네덜란드를 이기지 못한 데다가 약체인 라트비아마저 비겨버렸다. 거기다가 D조의 강자였던 체코에게 2대1 역전패 당하면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광탈하고 말았다. 토너먼트 강자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디 펠러 감독과 몇몇 선수들과의 불화설, 세대교체 실패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독일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다행스러운건, 이 충격요법 덕분인지 2년만에 독일은 젊은 팀으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3) 유로 2008 - 프랑스(2006년 월드컵 준우승팀)
(지단이 그라운드를 떠난 뒤 처음으로 맞는 국제대회, 지단의 공백이 워낙 컸는지 프랑스는 승점 1점만을 따내며 조 꼴지라는 치욕을 겪었다)
유로 2004에서 독일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겪었더니 다음 대회인 유로 2008에서 또 하나의 이변이 속출했다. 바로 2006년 월드컵 준우승에 머물렀던 프랑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전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감독 역량에 매번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던 레이몽 도메네크 감독이 '치트키'같은 존재였던 지단 없이 맞이한 첫 메이저대회였기에 진정한 프랑스에 대한 평가를 할 시점이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루마니아와 한 조를 이뤄 죽음의 조를 형성하면서 이 조에서 누가 올라갈 지 전혀 예측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단이 떠난 프랑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반드시 잡았어야했던 루마니아와 무승부를 거뒀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게는 골셔틀로 전락하면서 신나게 두들겨맞으면서 일찍 짐싸서 떠났다. 이러한 와중에 도메네크 감독은 별자리가 안좋았다느니 드립을 치면서 더욱 분위기를 악화시켰으나, 경질을 면했다. 그렇게 생명을 연장하던 도메네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었고, 대표팀 내 일어난 불화를 막지못하면서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죽음의 조에서 거의 탈락 확정된 네덜란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은 존재한가?
(이번 유로2012의 최대의 이변, 네덜란드의 몰락. 이것도 유로징크스 때문인가? 사진출처 스포츠투데이)
이러한 유로징크스가 다시 한 번 대두되면서 떠오르는 팀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네덜란드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지난 2010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거두었고, 이번 유로2012에서 스페인, 독일과 함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분류되었다. 독일, 포르투갈, 덴마크와 함꼐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어도 그들이 8강에 진출할 확률은 상당히 높았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은 채 네덜란드는 2전 전패로 B조 꼴지로 사실상 탈락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첫경기이자 반드시 잡았어야할 덴마크 전에서 그들은 27차례 때린 슈팅이 무색할 정도로 단 한 골도 만들어내질 못해 골결정력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했고 조직력이 아닌 선수들의 개인기량에만 의존하는 모습이었다(마치 2008년 프랑스를 보는듯 했다). 그리고 라이벌전인 독일전에서 네덜란드 선수들은 이게 라이벌전이 많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투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2대1로 패하면서 그들의 자존심마저 구겼다.
네덜란드가 현재 몰락하고 있는 이유를 꼽자면 가장 먼저 네덜란드의 주장인 마크 반봄멜이다. 한때 네덜란드 중원의 핵심선수였으나, 지금은 그저 퇴물에 불과할뿐더러 나이에 맞물려 계속 떨어지는 활동량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참고로 독일전에서 반봄멜이 전반전 45분동안 뛴 거리가 고작 4.95km였고, 반면에 반봄멜과 교체되어서 후반 45분을 뛴 라파엘 반더바르트의 뛴 거리가 6.3km, 이 경기에서 마리오 고메즈에게 2어시를 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뛴 거리는 무려 11.95km다. 반봄멜의 설렁설렁 뛰는 산책축구모드와 느슨한 수비, 그리고 쓸데없이 많이 범하는 파울횟수가 네덜란드를 망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두번째는 왼쪽 측면의 붕괴다. 네덜란드 국가대표의 레전드 출신이자 왼쪽 풀백으로 활약했던 지오반니 반브롱코스트가 은퇴한 이후, 줄곧 이 포지션에 누구를 배치할 지에 대해 네덜란드는 고민했었다. 그 대체자로 PSV의 에릭 피터스가 있었으나, 그가 대회 직전에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이 포지션이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바르트 반마르바이크 감독은 18살의 신예인 제트로 빌렘스를 과감하게 기용했지만, 이것 또한 악수로 작용했다. 수비수는 자고로 경험이 필요한 데 이러한 국제대회 경험이 전무한 빌렘스가 데뷔전을 유로대회에서 치뤘으니 흔들리는 게 당연했고, 줄곧 상대팀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빌렘스 이외에 왼쪽 풀백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가 현재 네덜란드 스쿼드 내에서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딕 카윗을 제치고 왼쪽 윙으로 선발출격하는 이브라힘 아펠라이의 경우, 물론 공격적인 재능은 카윗보다 아펠라이보다 한 수 위지만, 수비가담능력이나 공수밸런스에서 아펠리아가 다소 미흡한 점이 많다. 이러한 와중에 빌렘스와 함께 왼쪽 측면에 배치했으니 어느 누가 노리지 않겠는가. 두 경기동안 네덜란드는 덴마크와 독일에게 왼쪽 측면을 거의 내주다 싶이 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몰락 이유는 반마르바이크의 선수활용능력이다. 이번 유로대회에 출전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이 2년 전 반마르바이크 감독과 함께 남아공에 다녀왔기에 별 문제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2년이 자니도 전혀 변함없는 스쿼드(정확하게 말하면 경쟁력을 주지 않은 스쿼드가 맞겠다)를 구축하다보니 자연스레 주전과 비주전 사이의 불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빈 반페르시와 클라스-얀 훈텔라르, 그리고 라파엘 반더바르트와 베슬레이 스네이더의 기용문제다. 물론 반페르시와 스네이더가 국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봄멜이 계속 하락세이고 반더바르트는 소속팀인 토트넘에서 내내 상종가를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더바르트를 벤치멤버로 박아두었다는 건 다소 문제가 있다(현재 반더바르트가 네덜란드 국대팀에서 가장 많은 A매치를 소화하고 센츄리클럽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실정). 이렇게 선수 기용면에서 잡음이 생기니 팀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고, 이는 감독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포르투갈전을 앞둔 네덜란드, 과연 그들은 이번 유로징크스의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게다가 마지막 경기 상대인 포르투갈에게 네덜란드는 요근래에 이겨본 적이 없다. 네덜란드가 지난 2002년 월드컵 본선 실패하게 된 장본인이 바로 포르투갈에게 패배했던 점이었고, 유로 2004와 2006년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포르투갈에게 패하면서 우승의 꿈을 놓쳐버렸기에 사실상 힘들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또 포르투갈은 1승 1패를 기록중이기 때문에 마지막경기인 네덜란드를 상대로 죽자사자 덤벼들 것이고, 이러한 팀의 위기를 구제하기 위해 에이스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어떠한 모습으로 네덜란드를 뒤흔들어놓을 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네덜란드가 아직 100% 탈락확정을 지은 것은 아니다. 일단 포르투갈을 잡기만 한다면 어느정도 가능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잡고 독일이 덴마크를 잡게 된다면 승자승 원칙에 따라서 네덜란드가 진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네덜란드 > 포르투갈 > 덴마크 > 네덜란드). 그렇기에 네덜란드도 아직 포기하기 이르다는 것이다(물론 독일이 덴마크를 확실히 잡아준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유로에서 월드컵 준우승국의 유로 징크스가 깨질 지 안 깨질 지는 이제 네덜란드의 발 끝에 달렸다. 징크스라는 것이 계속 이어질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깨지게 마련이다. 여태껏 공식대회에서 한 번도 스웨덴을 이기지 못했던 잉글랜드도 이번에 3대2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프랑스도 지단이나 플라티니 없이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첫승을 올렸던 점을 보았을 떄, 네덜란드라고 징크스를 못깨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네덜란드 대 포르투갈전이 그만큼 더 중요하고 관심이 집중되는 경기가 아닌가 싶다. 과연 징크스의 여신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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