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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대결 Pt.1 : 디에고 마라도나 vs 리오넬 메시. 영웅적 삶의 스펙타클

J_Hyun_World 2012. 7. 8. 08:00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이며, 이 나라에서 축구는 국가적 자존심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아르헨티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앞장 선 전설의 산 마르틴 장군만큼이나 위대한 영웅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카를린 1999 <Locos por el futbol>. [El Pais Semanal] -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프랑코, 그는 11살이 되던 해인 1971년부터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축구광과 저널리스트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보기 드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 생각했으며, 실제로 "새로운 천재"라고 정의했다. 마라도나가 본격적으로 전세계 무대에 등장할 때 즈음에는, 1970년대까지 전세계를 주름잡았던 브라질의 영원한 신인 펠레와 네덜란드의 절대적인 카리스마 요한 크루이프가 지고 있을 때였으며, 한 사람 개인의 힘으로 경기 판을 뒤집는 경우가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을 때였다(현대축구의 장점인 전술과 팀워크가 절대적인 승리를 불러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때에 마라도나라는 한 축구선수의 등장은 마치 "신이 내린 선물"과 다름없었다. 

 

(펠레와 크루이프 이후,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1980년대의 상징. 디에고 마라도나)

 

  마라도나가 축구 선수로 발을 들인 이후,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다. 1976년, 16살의 나이(정확히 말하자면 1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에 그는 아르헨티노스 1군 무대에 데뷔하였고,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준 덕분에 그는 1년도 채 안되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부터 호출받게 된다. 1979년 18살의 나이에 그는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당시 명칭은 주니어 월드컵)에 출전하여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고, 1981년에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1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마라도나는, 1982년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인 유럽 무대 도전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는 겨우 22살. 바르셀로나에서 마라도나의 삶은 사실 순탄치는 않았지만, 1983년 코파 델레이 우승에 기여하였고, 두 시즌 동안 38골을 뽑아내는 등 개인적인 부분에선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던 마라도나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나폴리로 마라도나는 1984년 쫓겨나듯이 넘어갔는데, 마라도나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폴리는 그저그런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약체 클럽이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합류한 이래에 그들은 리그 순위가 수직상승하면서 리그 우승권을 넘보기 시작하더니 1987년 나폴리가 팀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 챔피언에 등극하게 되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나폴리는 마라도나를 앞세워서 1989년 UEFA컵 우승으로 유럽을 제패했고, 1990년에는 AC밀란을 누르고 다시 리그 챔피언에 올라섰다. 그의 클럽에서 활약과 맞물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서 화려한 족적을 남겼는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주장으로 출전하여 아르헨티나의 두번째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나 마라도나의 스페셜 경기 중에서는 언제나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의 8강전이 부각되며, 이 경기는 현재까지 회자되곤 한다. 이 경기가 매번 부각되는 이유는 마라도나의 신의 손논란이 있었지만, 그보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두 국가의 좋지 않은 감정대립을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대표하여 해소시켜주었던 경기였기 때문이다.아르헨티나에 처음 축구를 도입한 사람들은 1880년대 영국인 이주자들이었고, 초기의 아르헨티나 축구는 철저히 영국식 축구에 지배당했었다. 영국의 특유의 성격인 침착함, 규율, 조직력, 단결, , 체력의 요소들에 대한 집중, 이것이 영국이 강조하던 축구의 덕목이었다. 이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크리올로(여기서 크리올로란 남미로 이주한 유럽인의 후손을 말함)들은 라틴계의 영향을 받아 활동적이고, 개인적이며,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노력에 기초해 민첩하고 기교가 넘친다. , 영국식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1982년에 일어난 포클랜드 전쟁도 한몫했다. 포클랜드 전쟁의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이 전쟁을 통하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가뜩이나 영국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서 영국에 대한 증오과 적개심이 더 끓어올랐고 이런 복잡적인 요소가 섞이면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아니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크리올로를 상징하는 마라도나의 대결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신화적 요소로 승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남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 vs 잉글랜드 경기는 마라도나라는 구국적 영웅을 통하여 아르헨티나가 당시 영국에게 맺힌 감정대립을 해소시켜주었던 경기였다)

 

   물론 마라도나에게 크리올로적인 이미지만 담겨있는 건 아니었다. 포트레로에서 공차는 '소년(=피베)'의 이미지 또한 그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철저히 틀에 박힌 교육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이고 즉흥적으로 공을 다루는, 마치 펠레처럼 축구에 대한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마라도나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크리올로 이외에 피베라는 상징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영국성(철저한 틀에 박혀서 이루어지는 형식)과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이미지였고, 마라도나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피베, , '엘 피베 데 오로(황금의 소년)'라고 불렸다. 피베가 되어 피베로 남아있는 마라도나의 이미지는 흔히 말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인물이었고(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극빈자 지역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포트레로라는 배경이 그를 만들어주었다. 축구경기장 밖에서도 자유분방하고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마라도나의 모습은 분명히 포트레로와 피베를 대표하는 마라도나다운 모습이었고,마치 영원히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피터팬처럼 마라도나를 영원한 피베로 만들고 싶어했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한가지 더 재밌는 사실은 보통 마라도나 같은 스포츠스타가 등장하면 단순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을 넘어 초국가적인 선수로 자리잡게 됨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브라질의 호나우두 같은 경우에는 브라질을 뛰어넘어 전세계를 초월하는 황제로 부각시킨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서포터와 스포츠 기자들은 그러한 흐름과 정반대로 마라도나를 아르헨티나에 국한된 신화적 영웅으로 만들려는 데 주력했었고, 실제로 그러한 요소들을 마라도나가 다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었다.

   

('황금의 소년'으로 불리면서 아르헨티나의 영웅으로 자리잡은 마라도나. 하지만 그 타이틀이 그의 몰락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적인 인물은 결국 약물파동으로 인해 해피엔딩이 새드엔딩으로 바뀌게 된다. 마라도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일종의 몰락하는 체 게바라(마라도나가 자신의 우상이라고 고백한), 볼리비아 정글에서 막강한 군대에 대항해 불가능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체 게바라라고 생각했다. 마라도나에게는 그 볼리비아 군대가 단지 FIFA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1990에 나폴리에서 활약할 당시, 마약을 복용한 채 여러 불미스러운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고, 1991년 3월 17일, 마라도나는 바리와의 홈경기 직후 무작위 도핑 스트에서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이며 그 즉시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했다. 그 충격으로 마라도나의 삶은 약물과 코카인으로 얼룩지면서 한동안 축구계를 떠났다가, 1993년 10월에 뉴웰스 올드 보이스 선수로 다시 축구계로 복귀했다. 떄마침 마라도나가 축구계로 떠나 있는 동안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은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그 어느때보다도 마라도나의 구원이 필요했다. 이미 한 번 추락한 경험을 겪었던 마라도나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기 위해 1994 미국월드컵에 참가했고, 그리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을 했으나, 이때도  경기 직후 무작위 도핑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을 보이며 나아지리아전 이후로 영원히 축구계를 떠나야만 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마라도나의 이러한 크나큰 사회적 스캔들에 접하고 난 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몰락하는 구국적 영웅에 대하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의 사회적 물의에 대한 실망이나 배신감을 표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 '애도'라는 표현을 쓰면서 무너져가는 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대단히 슬퍼했고 자기 자신들을 자책했다. 그 전에 앞에서 마라도나의 이미지 중 하나로 언급했던 '피베' 라는 이미지의 다른 면을 보자면, '키가 작은 소년', '신체적 움직임',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한 일상생활'이라는 점인데, 그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함'이 때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데 피베들은 이러한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러한 피베의 무지각을 감싸주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마치 단순히 아르헨티나 축구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마라도나를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마치 하나의 멜로드라마 혹은 사이코드라마로 각색시킨 뒤에 그를 끊임없이 미화시켜 그의 잘못까지 다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마라도나는 '비극적 영웅'으로 기록되는 것이며 아르헨티나 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신화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라도나 이후 아르헨티나의 최고의 재능이자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리오넬 메시는 어떠한가?)

 

  이러한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향수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마라도나 이후로 등장하는 수많은 피베들로부터 포스트 마라도나를 찾으려고 하였. 2001년 세계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던 하비에르 사비올라를 비롯하여 카를로스 테베즈, 리오넬 메시, 그리고 마라도나의 사위인 세르히오 아구에로까지(지금도 마라도나처럼 체구가 작은 수많은 아르헨티나 축구선수들은 이러한 피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이러한 수많은 아르헨티나 차세대 영웅 후보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는 아마 리오넬 메시가 될  것이고, 실제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메시를 보고 자신의 후계자라고 직접 언급까지 했었다. 

 

 

"그 당시 메시는 하부 카테고리에서 대활약을 했었지. 2002-2003 시즌이었던가, 카데테 B팀에서 30경기 37득점을 올린 적이 있었어. 나도 그 경기를 봤지만 나이에 비해 상당히 빼어난 기술을 가졌지. 키는 정말 작았지만,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고 있었고 스피드도 있으며 드리블도 매우 좋았어. 그렇지만 마라도나와 비교하는 건 좀 과장이다 싶었지. 단지 좋은 선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정도였어."


- 마르카지, 루이스 페르난도 로호 -

 

  2003년 메시는 겨우 16살 정도였다. 표정에는 어린 소녀의 천진난만함이 남아있고, 조금 큰 바르셀로나의 연습복을 입고는 비가 왔었는지, 젖은 긴 머리카락이 볼에 붙어 있다. 당시 세상은 아직 메시를 몰랐다. 그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던 사람들은 바르셀로나의 일부 열광적인 팬들 뿐이었을 것이다. "마시아의 마라도나!" 라고. 2003년 9월 8일 바르셀로나의 지역신문 La Vangardia에 메시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에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출신인 메시가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서 얼마나 활약했고 득점해냈는지, 그리고 유럽에서 이미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주목한다는 사실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바르셀로나 현지 팬들은 장래가 유망한 이 16세 소년의 활약을 보며 기뻐하면서도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마라도나 2세라고 불리는 유망주들은 마라도나의 은퇴 이후 이미 수십 명이나 나타났고, 그 중 대부분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이스 페르난도 로호의 회고담처럼 생각했던 것은 어찌보면 그 당시엔 당연했었다. "포스트 마라도나"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이 자라나는 아르헨티나 유망주들에게 주는 심리적인 압박은 거의 숨통을 조일 정도였으니깐 말이다. 더군다나 성장호르몬 분비에 장애까지 짊어지고 있었던 메시였기에 과연 이 선수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할 지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메시의 경기를 주목하고 있다. 캄프 누에 모여드는 바르셀로나 팬들과 스페인 축구팬들, 심지어 아르헨티나의 신화인 마라도나까지도.

 

(2004년에 본격적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한 이후, 초고속성장으로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리오넬 메시)

 

  2004년 10월 16일, 바르셀로나 더비에서 공식적인 리그 데뷔전을 치뤘고,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05년 5월 1일 알바세테전에 1군 데뷔 첫 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스페인 시민권을 취득하고 2005-06 시즌부터 그의 진가는 확실히 드러났다. 특히나 우디네세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경기에서 당시 바르셀로나의 슈퍼스타였던 호나우딩요와 보여줬던 화려한 조화는 그야말로 기립박수감이었고 또 하나의 스타를 예고하는 플레이였다. 그러다 레이카르트 체제에서 쓰리톱 중 한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면서(당시에 R-E-M 조합으로 불렸었다) 그의 성장은 눈부시게 빨랐다. 특히 2007년 3월 10일 엘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한달 후인 코파델레이 4강전인 헤타페전에서 메시는 마라도나를 연상케하는 골을 두 골이나 넣었는데 이 골들로 그는 '메시도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2008년 여름, 펩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하고 호나우딩요가 바르셀로나를 떠나면서 메시는 10번을 물려받았고, 과르디올라 사단의 바르셀로나와 함께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는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뛰면서 라리가 우승 뿐만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코파 델레이, UEFA 슈퍼컵, 그리고 클럽 월드컵 우승까지 전부 다 맛보았고, 팀 타이틀에 비례하여 개인 타이틀도 전부 다 싹쓸이해갔으며, 종전의 클럽의 기록마저 전부 다 갈아치우고 있다. 그는 이제 겨우 25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선수 리오넬 메시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 리오넬 메시는 달랐다. 그의 기량이 클럽과 국가대표에서 보여줬던 것이 달랐다는 게 아니라 그를 대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태도가 바르셀로나 팬들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메시 또한 마라도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공장 노동자 가정+크리올로 출신이고, 그 또한 포트레로라는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술적 측면의 피베로 보자면 메시가 마라도나와 가장 일치했다. 하지만, 메시와 마라도나와 결정적 차이점은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프로무대를 아르헨티나에서 데뷔한 반면에, 메시는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내에서는 그는 카탈루냐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렇기 떄문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마라도나와 달리 그에게는 상당히 엄격한 잣대로 그를 평가하려 들고 매번 아르헨티나가 부진하게 되면 모든 비난의 화살은 메시에게로 이어진다(마라도나처럼 무한적으로 감싸주질 않는다는 것이). 바르셀로나에서는 구국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아있는 신화이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메시는 그저 일반적인, 아니 잘하는 축구선수로 취급되고 있다. 반면에 카를로스 테베즈의 경우에는 메시와 정반대다. 그의 행동이 오히려 마라도나와 같은 무질서한 피베이며,아르헨티나에서 데뷔하다보니 테베즈가 마치 마라도나 입지 못지 않게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 테베즈가 축구장 밖에서 여러 사고를 치고 다닐 때에도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현재는 메시도 이제 아르헨티나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쪽으로 선회했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마라도나 때와는 대접이 달랐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영웅적 삶의 스펙타클의 완료형인 마라도나와 현재진행형인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 이 두 사람은 상당히 흡사한 길(영웅적인 삶)을 걷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마라도나는 그의 선수시절 인생 전체가 하나의 아르헨티나 신화로 남아있는 반면에, 메시는 그러한 아르헨티나의 구국적인 신화 앞에 작아지는 한 명의 인간(그렇지만 바르셀로나에서만큼은 그는 신화적인 인물이다)이다. 하지만 메시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어떻게 미래가 바뀔 지 모른다. 훗날 그가 은퇴하고 나서도 마라도나를 뒤를 잇는 신화연대기를 만들 여지는 아직 충분히 많으니까 말이다. 산 마르틴 장군, 디에고 마라도나, 그리고 그 다음 공란에 리오넬 메시라 쓰여질 지 지켜볼 만하지 않은가? 아마 메시가 그 공란에 이름이 적힌다면,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월드컵 정상에 들어올릴 때쯤이 될 것이다.

 

 

원문 : 저서 <스포츠스타(13인의 스포츠 아이콘으로 읽는 문화, 문화정치)> 中 디에고 마라도나 편. by 에두아르도 아르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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