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명문구단 유벤투스를 대표하는 선수를 꼽아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이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다. 그는 토리노에서 태어난 토리노 로컬보이는 아니지만, 자신의 축구커리어 한평생을 유벤투스 팀 하나에 다 바쳤고, 유벤투스와 함께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지난시즌까지 유벤투스의 주장으로 뛰었다. 그렇다보니 비안코네리들에게 있어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라는 선수는 단순히 선수 그 이상을 넘어 '델피에로=유벤투스'라는 공식으로 평생 기억남았고, 전세계 축구팬들까지도 이 공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유벤투스에서 델피에로의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울산에서도 델피에로 같은 상징성을 가진 선수가 존재했다. 그도 델피에로처럼 울산 로컬보이가 아니었고, 델피에로 못지 않게 흔하지 않은 테크니션이었으며, 최전방에서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울산과 함께 희노애락을 하면서 한평생 울산에서만 선수생활을 보냈다. 심지어 은퇴도 울산에서 은퇴식을 치뤘다. 그렇기에 그의 또다른 별명은 'Mr.울산'이었다. 그가 바로 '울산의 델피에로'였던 '가물치' 김현석이다. 유상철과 함께 오로지 K리그에선 울산에서만 뛴 김현석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2. '가물치' 김현석
1. 비범한 재능을 보이던 강원도 소년, 야망을 키우다
김현석의 고향은 강원도 삼척이다. 그렇다보니 올시즌에 울산이 강원 원정 갔을 당시에, 그는 강원 서포터석으로 인사하러 갔었고, 지역출신인물에 대해 애착이 강한 강원분들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던 에피소드가 있다(그것을 빌미로 김학범 강원 감독이 김현석을 강원의 수석코치로 데려온다는 설까지 돌았다). 어찌됐든 삼척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공을 차기 시작했고, 삼척초등학교를 거쳐 강릉중학교로 진학할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강릉중 감독이었던 이태복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김현석은 앞으로 크게 성장할 선수"라고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고 한다. 김현석이 언론에 처음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16세, 중학교 전국 대회였다. 당시에 100m에 12.5초를 찍고 발군의 골감각과 공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김현석을 앞세운 강릉중이 중학교대회에서 선전했었고, 김현석은 그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강릉농고로 진학한 김현석은 고등학교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경기를 지켜본 연세대 축구부 스카우터들이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연세대로 데려갔다. 연세대에 입학하고 난 뒤에도 김현석의 활약은 대단했다. 연고전에서 그는 2골을 터뜨리면서 연세대의 승리를 가져다 주기도 했고(1987년), 당해에 있었던 전국 축구선수권에서도 연세대를 결승전까지 끌고 갔을만큼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렇게 1989년까지 김현석은 연세대의 핵심 스트라이커로 자리잡으면서 거의 모든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켰고, 상대팀 입장에선 김현석이라는 세 글자가 상당히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1989년에는 주장완장을 차고 연세대를 제37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정상에 올려놓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대학교에서도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던 김현석은 송주석-김영철과 함께 현대(=울산, 1991년부터 울산 연고지에 정착하였다)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이 입단이 앞으로 그를 울산 레전드로 만들어놓는 복선이라곤 아무도 예상못했다.
2. 김현석이 영원히 짊어질 두 글자, '울산' (1990~1993)
(1991년 김현석(오른쪽에서 두번째)의 모습. 대학리그를 평정하고 1990년 프로무대에 입성하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프로 새내기임에도 불구하고, 구단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이나 컸다. 왜냐하면 지난시즌 현대는 스트라이커에서 약점을 드러내어 리그 꼴지를 기록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신인 드래프드에서 송주석-김현석 등 대학리그에서 속칭 '날라다니던 스트라이커'들을 데려온 것이다. 스트라이커 영입러쉬로 울산이 1990년 리그 우승후보로 거론되곤 했지만, 6팀 중 5위로 마감했다.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진 않았지만, 김현석은 첫시즌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당시 우승팀인 럭키금성 황소를 상대로 데뷔골을 뽑아내면서 럭키금성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리그 28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하면서 득점왕 9위에 랭크되었다(함께 입단한 송주석은 이 해 신인상을 쓸어갔다).
중요한건, 김현석은 프로축구리그에서만 주목받았던 것이 아니라 국가대표팀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당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탈락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 대표팀은 프로에서 뛰는 신예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반전의 분위기를 노리고 있던 터였다. 김현석은 국가대표에 승선하여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현석은 국가대표와는 크게 인연이 없었다. 총 그가 출장한 A매치는 22경기였고, 그 경기동안 김현석이 기록한 골은 5골. 국가대표팀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 '국내용'이라는 오명도 따라다니곤 했다. 사실 그가 국가대표에서 외면당한 이유는 어찌보면 부진이라기 보단 시대에 맞지 않았던 유형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당시 90년대 한국대표팀은 180cm 이상의 신장과 준족의 스트라이커를 추구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선호되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황선홍이었다. 황선홍 같은 스타일의 공격수와 당시 한국이 독일식 스타일(일명 뻥축구라고 하겠다)을 롤모델로 삼고 있었기에 테크니션인 김현석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국가대표 생활은 1996년이 마지막이었다. 참고로 김현석의 스타일은 신들린 퍼스트 터치와 수비수의 타이밍을 빼앗는 정확한 슈팅, 그리고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다.
(차범근호의 에이스로 자리굳힌 김현석(왼쪽), 차범근 감독(오른쪽) 휘하에서 리그를 휘젓고 다녔다)
성전 부진이라는 이유로 김호 감독은 현대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한국축구의 레전드이자 박지성보다 먼저 유럽 전역에 이름 석 자를 알렸던 '차붐' 차범근이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차범근 호 출범 이후, 본격적인 울산의 에이스가 되었다. 1991년 시즌에서 울산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김현석은 14골을 뽑아내며 K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축구에서 볼까말까한 테크니션으로 불렸기에 그의 득점장면이나 공을 다루는 기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91년 시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 1992년 시즌부터 1993년 6월에 상무로 입대하기 전까지 울산을 이끌어갔고, 1992년 시즌에는 신홍기와 함께 팀 내 득점 1,2위를 차지하였다(김현석은 9골 7도움, 신홍기는 7골 5도움이다). 한 편, 김현석과 같이 입단하며 주목을 받았던 송주석은 골침묵으로 부진의 늪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김현석이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팀 전력에서 이탈한 1년 6개월 동안 차범근 호는 매번 불운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요즘처럼 울산이 핵심선수들이 대거 국가대표에 차출되거나 선수들이 중요한 순간마다 부상신 강림으로 전력에서 빠지다 보니 한 때 포항과 공동 최다승을 기록했던 적도 있음에도(1992년 13승) 우승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차범근은 울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 돌아온 'Mr. 울산', 1990년대 중반 고재욱 호의 선봉장이 되다 (1995~1999)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현석은 울산에서만 3번째 감독을 맞이한다. 그리고 울산엔 명장 고재욱 감독이 왔다.)
김현석이 상무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에는 그를 에이스로 활용하던 차범근은 떠났다. 성적 부진이 이유였다. 그리고 차범근이 떠난 자리엔 예전 LG 치타스를 이끌던 명장인 고재욱 감독이 있었다. 고재욱 감독은 1994년 1년동안 유럽을 돌면서 동력을 강화해 빠른 축구를 통해 울산의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시키겠다며 포부를 밝혔고, 선수단 역시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영국, 벨기에, 독일 3개국으로 동계 전지훈련을 떠났다. 나도 이당시 김현석의 활약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요즘과 비교한다면 뭐랄까, 현재 울산의 이근호와 같다고나 할까. 이근호랑 스타일이 같다는 게 아니라 팀 내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이 같다는 것이다. 고재욱 호에서 김현석의 역할은 말그대로 '크랙'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울산 상남자 축구에 희귀한 유형인 유일한 테크니션이었던 김현석이기에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사실 김현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트피스 키커도 김현석이 전담했을 정도였으니까 이정도면 입 아프다.
1995년 시즌에 김현석은 자신의 커리어 중 한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리그 26경기 출장 12골, 아디다스 컵 7경기 출장 6골, 도합 33경기 18골을 기록하면서 거의 2경기에 1골을 기록하는 순도 높은 골결정력을 자랑했다. 특히나 김현석의 득점을 앞세워 울산은 이 해에 아디다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당시 스포츠 뉴스를 찾아보면 온통 김현석 이야기로 도배될 만큼 그의 신드롬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1995년 김현석의 일화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그 해 9월에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가 내한했을 때, 한국 대표팀이 이를 맞이하기 위해 K리그 슈퍼스타들도 차출했다. 그 때 K리그를 뜨겁게 달구던 삼각편대 김현석-황선홍-노상래가 나란히 뽑혔다. 여기서 김현석은 경기 후 당돌한 발언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마라도나가 지는 해라면, 나는 뜨는 해다." 였다. 마치 이천수를 연상케하는 당돌함이고, 그 당시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하던 인터뷰 스타일을 철저히 깨뜨렸다.
그의 화려한 플레이는 이듬해인 1996년이 되어야 비로소 큰 결실을 맺었다. 김현석을 앞세워서 울산은 1996년 K리그 전반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좋은 흐름을 가져갔다. 하지만 우승한 뒤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바로 후반기 우승 타이틀을 수원에게 빼앗기면서 챔피언결정전을 준비해야만 했었다. 1차전인 홈경기에서 울산은 1대0 패배로 수세에 몰린 채로 2차전 수원 원정을 떠났다. 여기서 김현석은 에이스답게 빛냈다. 그는 수원 원정에서 귀중한 선제골을 뽑아내면서 울산의 극적인 역전 발판을 마련했고, 뒤이어 유상철의 추가골과 황승주의 쐐기골에 힘입어 울산은 적진에서 3대1 승리, 총합 3대2 승리를 만들어내면서 팀 역사상 최초 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라섰다. 울산이 13년만에 처음으로 왕좌에 앉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가는 데 있어서 1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번시즌 주장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어 나갔던 김현석이었고, 그 공로의 보답으로 김현석은 1996년 올해의 선수상을 받게 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 올해의 선수상을 같은 팀 동료인 김병지-신홍기와 경합했다는 점이다.
(1996년 K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쥔 가물치 김현석(왼쪽))
이듬해인 1997년은 김현석 개인에게 있어서 롤러코스터 같은 해였다. 디펜딩 챔피언의 울산이 가야할 길이 바쁜데, 하필이면 김현석이 중요한 순간에 부상을 당하게 된다(그 때가 1997년 7월). 이것이 울산의 타이틀 방어에 있어서 큰 타켝을 주었고, 9월에 김현석을 비롯하여 주축선수들이 부상에서 복귀하게 되지만, 리그 챔피언 타이틀과 리그컵 챔피언 타이틀 모두 빼앗기면 무관으로 시즌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대신 김현석 개인 기록은 희소식이 있었다. 2개월이라는 부상공백에도 불구하고 김현석은 1997년 K리그 득점왕(17경기 9골)을 차지하면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리그 컵에서는 13경기 4골 기록). 이듬해인 1998년 김현석은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단적인 예가 1998년 리그 컵에서 11골을 몰아치면서 컵대회 득점왕으로 등극하면서 동시에 리그 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1998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김현석은 연봉 1억 2천만원에 재계약하면서 황선홍과 함께 당시 최고몸값을 기록하기도 했다.
프랑스월드컵 여파로 정규리그 개막을 뒤늦게 치뤘던 1998년, 김현석은 이 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는데, 이당시 고정운과 함께 40-40 클럽을 누가 먼저 가입하냐를 걸고 경쟁을 펼치기도 했었다(결국 고정운이 먼저 달성했다). 정말 김현석이 무서운 게 무엇이냐면 비록 고정운보다 한 발 늦게 40-40 클럽을 달성했지만, 그 대단한 기록을 달성했던 경기가 1998년 10월 10일 울산의 최대라이벌인 포항과의 동해안더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정수의 선제골 어시스트로 개인 통산 40-40 클럽을 달성하고, 동해안더비 승리까지 챙겨가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김현석의 40-40 클럽이 더 빛나는 것은 한 클럽에서만 달성했다는 것이 K리그 역사상 김현석이 최초다(그 이후 원클럽 소속으로 40-40 클럽에 가입한 사람으론 신태용과 2012년 올시즌에 40-40 클럽에 가입한 황진성 뿐이라는 점). 플레이오프였던 동해안더비에서 김현석의 존재는 대단했다. 그때 현장에서 봤던 그의 프리킥 골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수원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김현석의 활약은 백점 만점의 백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유상철이 J리그로 진출하고, 울산이 야심차게 데려온 선수들인 김도균, 이길용이 부상으로 쓰러지며, 수문장 김병지 마저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울산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오랫동안 울산을 이끌어왔던 김현석이라 할 지라도 부상병동 천지가 되버린 울산을 나홀로 이끌고 나가기엔 벅찼다. 고재욱 호와 김현석에게 있어서는 그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즌이었고, 울산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4. 짧지만 강렬했던 J리그 도전기, 그리고 울산을 향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2000~2003)
(2000년 김현석은 울산을 떠나 J리그로 진출했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9년 12월 20일, 울산에 비상이 걸렸다. 다름아닌 팀의 핵심인 김현석이 J리그 진출을 하게 된 것. 그의 행선지는 가와사키 베르디였고, 당시 그 팀에는 이국수 총감독과 장외룡 감독이 있었다. 김현석은 연봉 4억 4천만원을 받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일본에서 김현석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페널티킥 하나 없이 순수 필드골로 16골 2도움을 기록하면서 당시 J리그에서 같이 뛰던 울산 출신인 유상철과 함께 J리그를 "씹어먹고 다녔다". 김현석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그를 일본으로 보낸 울산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울산을 성공기로 이끌었던 고재욱 감독은 건강 문제로 도중 하차하게 되니 울산의 팀 분위기가 정상일 리가 없었다(울산은 2000년 시즌 팀 최악의 순위인 꼴지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러한 와중에 김정남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였고, 울산은 2000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리빌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가와사키 베르디와의 계약 기간이 끝나던 찰나였고, J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다 보니 다른 J리그 클럽들이 김현석을 원했다. 김현석의 한시즌 활약상을 봤으니 다른 팀에서 가만히 냅둘 리는 없었다. 어떠한 J리그 클럽은 그에게 2년 계약에 10억원이라는 큰 액수로 오퍼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려움에 빠져있던 울산이 김현석에게 SOS 요청을 했다. 이쯤되면 갈등할 법도 한데, 김현석은 망설이지 않고 울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택하면서 2001년 초 귀환했다. 울산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그의 의지 덕분에 극적인 복귀가 이뤄진 셈이었다. 김현석 복귀와 함께 김정남 감독은 스카우터를 브라질로 파견하여 끌레베르-마르코스-파울링뇨-바이아노 4인방을 데려왔고, 대학리그에서 조세권-서덕규가 합류하면서 새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울산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김정남 감독의 4-4-2가 고재욱 감독의 4-4-2에 비해 수비에 중점을 두다 보니 울산이 이 틀에 적응하기엔 쉽지 않았다.
(2001년 7월 21일, 대망의 50-50 클럽을 기록한 노장 김현석. 이 기록은 K리그 역사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팀 분위기에 맞물려 김현석도 시즌 초반에 영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다보니 90년대 축구판을 휘어잡던 그 마법은 좀처럼 나오지 못했고,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디다스컵 2001에서 단 하나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김현석은 정규리그에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2001년 7월 21일, 전남 광양 원정이었다. 김현석은 전반 13분, 프리킥 상황에서 오른발로 감아찼고 그것을 마르코스 머리에 연결시켜 헤딩골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마르코스의 골을 도우면서 김현석은 사상 처음으로 50-50 클럽에 가입하면서 K리그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그의 개인 통산출장 300경기 기록을 자축하는 세러모니이기도 했다. 4일 뒤인 부천과의 경기에서 김현석은 개인 통산 100호골을 기록했다. K리그 역사상 두번째 기록이었다. 김현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9월 22일 안양전에서 101호골, 10월 13일 대전전에서는 윤상철이 보유하고 있던 102호골을 기록하면서 타이를 이루었으며, 10월 13일 부천전에서 103호골로 윤상철을 넘어섰다. 그리고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28일 수원전에서 김현석은 104호골을 기록하며 다시 기록을 갈아치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울산이 정규리그 6위로 끝났다는 것이다.
2002년은 김현석에게 새로운 모험이 시도되었는데, 바로 포지션 변경이었다. 그는 축구커리어 통틀어서 공격수로만 뛰었었기에 우리에게 그는 판타지스타나 다름없는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그가 다른 포지션으로 변경한다는 자체가 상상이 안되었다. 2002년 시즌에 이천수와 같은 슈퍼 탤런트의 입단과 외국인선수들의 가세로 공격쪽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기에 사실 그의 자리란 없었던 반면, 울산은 지속적인 수비불안을 노출하고 있었기에 김정남 감독은 그를 스트라이커에서 센터백으로 포지션 변경하기를 권유했다. 의외로 김현석은 이러한 어려운 고민을 별 망설임없이 쉽게 수락했다. 김현석이 센터백으로 변신하였다고 해서 그의 득점력이 무뎌진 것은 아니다. 그의 골감각은 아디다스컵 대회기간과 성남과의 결승전에서 빛났다(특히나 그의 프리킥 골은 명불허전이었다). 공격수로 한평생 뛴 경험이 오래되었다보니 김현석은 울산 수비진을 리딩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어려운 점이 없었고, 덕분에 울산의 수비진이 견고해졌다. 게다가 2002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이천수가 K리그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고, 90년대 울산의 상징 중 한 명이었던 유상철이 다시 합류하면서 울산은 리그 2위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끝마쳤다. 이와중에 김현석은 도합 6골을 기록하면서 K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110골까지 늘려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즌이라 불리는 2003년, 울산은 성남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내줬기에 절치부심하여 다시 타이틀에 재도전하였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팀의 중추였던 유상철과 이천수가 각각 일본과 스페인으로 이적해버렸기 때문이다(유상철의 이적건은 유상철 편에서 언급함). 그렇다보니 차-포를 잃은 울산 입장에선 성남의 2연패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김현석 혼자서 마법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제 30대 중반을 넘었던 그였기에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던 터였다. 20경기를 소화한 김현석은 8월 15일에 있었던 K리그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치르고 축구화를 벗게 되었다. K리그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건 김현석이 K리그 선수로서는 3번째였고(앞선 두 명은 김주성과 고정운), 그 당시 올스타전은 80년대 스타 vs 90년대 스타간 대결로 화제를 모았다. 거기다가 당시 지방팀 홈구장을 돌면서 치르던 전례를 프로축구연맹이 깨고 상암에서 개최하는 바람에 각 팀 서포터들이 항의차원에서 음소거 서포팅을 하기도 했다.
(김현석의 울산 커리어는 많은 의미를 가져다주었고, 원클럽맨의 좋은 표본이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김현석이라는 이 이름 3글자는 울산이라는 클럽의 정체성과, 그리고 K리그 자체에 던져주는 게 상당히 크다. 비록 자신의 최다골 기록을 후에 우성용, 김도훈, 이동국이 넘어섰지만, 110골이라는 수치는 그만큼 K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공격수였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본다. 비록 그가 국가대표 커리어가 미미한 점 때문에 요즘에 입문한 K리그 팬들의 경우에는 김현석을 듣보잡 취급하거나 '누구지?' 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상철과 함께 김현석은 K리그에서 줄곧 울산만을 고집했었고, 돈보다도 의리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K리그를 대표하는 원클럽맨으로 부각되고 있다. 고정운의 40-40 클럽보다도 더더욱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바로 울산이라는 한 팀에서 이뤄낸 결과라는 점이고, 최근 포항의 황진성의 40-40 클럽 가입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큰 이유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기간 한 클럽에서만 뛰지 않고, 그저 돈만 보고 다른 클럽으로 떠나버리는 몇몇 선수들과 원클럽맨에게 소홀히 대접하는 구단들을 향한 일종의 일침과도 같다. 특히나 요즘 K리그 판도를 보면 10시즌 이상 한평생 한 클럽만을 고집하고 뛰는 선수들을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이러한 원클럽맨의 존재는 팀의 역사와 브랜드 가치를 한껏 상승시키는 요소이기도 하고, 각 리그 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자부심과도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흔히 간과하고 있다. 내가 해외축구 선수들 중에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에게 상당한 애착을 가졌던 것도 김현석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점이 아니었나 싶다. 현재 김현석은 은퇴 후, 2004년 독일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2005년부터 울산 코치직에 합류하여 현재 울산의 수석코치직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AFC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김현석이 수석코치 신분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때, 궁금했다. 선수+코치 생활을 한 클럽에서 겪으면서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때, 과연 무슨 기분이었을까 말이다.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면, 앞으로 김현석 같은 원클럽맨이 울산에서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한 원클럽맨을 김현석의 손으로 탄생하다면 그것만큼 더 값진 것은 없을 것이다.
참고 : http://footballk.net/mediawiki/%EA%B9%80%ED%98%84%EC%84%9D
http://en.wikipedia.org/wiki/Kim_Hyun-Seok
http://ko.wikipedia.org/wiki/%EC%9A%B8%EC%82%B0_%ED%98%84%EB%8C%80_%EC%B6%95%EA%B5%AC%EB%8B%A8
http://revofpla.hided.ip.ne.kr/wiki.php?key=%EA%B9%80%ED%98%84%EC%84%9D
http://sports.news.nate.com/view/20100701n05762
울산 구단 홈페이지 - 강호의 울산백서 4번째 편부터
다 읽으시고, 밑에 있는 VIEW를 눌러서 추천해주시면 저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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