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건너축구/서반국

토레스가 마드리드로 돌아오기까지의 기승전결

J_Hyun_World 2015. 1. 4. 20:13

 

 

 

 

기(起) : 스페인 마드리드에 나타난 '엘 니뇨(El Niño)'의 거병

 

(2000년대 초반 혜성같이 등장한 금발머리 소년, 비센테 칼데론에서 거병하다. 사진출처 인터풋볼)

 

  이 금발머리 소년의 집안은 대대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열렬한 지지층이었고, 집안배경 덕분에 1995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비센테 칼데론에서 뛰는 기회를 얻었다. 그 후, 4년 후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유 나이키컵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이끌고 맹활약하면서 그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이것은 페르난도 토레스라는 신예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조짐과도 같았다. 이 10대 소년은 2002/03 시즌부터 라리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선봉장으로 나서 팀을 이끌기 시작했다(29경기 출장 12골). 이듬해인 2003/04 시즌에서는 한 층 더 발전한 모습으로 35경기 출전 19골이라는 기록하면서 득점 3위에 랭크됨과 동시에 불과 19살의 나이에 주장완장까지 차는 막중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다. 게다가 기존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던 '카피탄' 라울 곤잘레스의 뒤를 잇는 정통 후계자로 급부상하기까지 했다. 비록 첫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2004 에서는 스페인이 부진으로 조별리그 탈락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감을 보여줄 기회는 없었으나, 토레스의 주가는 오히려 더 치솟기만 했다.

 

  리그 7위를 기록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다음시즌인 2004/05 시즌에 인터토토컵 출전기회를 부여받아 유럽대항전에 나가게 되었고, 약관의 주장인 토레스는 팀을 이끌고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등 상당한 선전을 펼쳤다(결승전에서 비야레알과의 대결에서 승부차기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이 대회에서 빛났던 '엘 니뇨'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오일머니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첼시의 레이더망에 잡혔었으나, 당시 아틀레티코의 구단주인 엔리케 세레소는 '토레스가 지금 당장 첼시에 가기엔 뛸 자리가 없다.'고 밝히면서 단호하게 블루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타 클럽들의 토레스에 향한 관심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기에, 2006년 1월 구단은 토레스를 향한 이적 제의에 귀기울일 용의가 있다면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3월에 뉴캐슬이 다른 구단에게 빼앗기기 전에 토레스를 가로채가기 위해 시도했고, 시즌 말미에 첼시에서 다시 한 번 이적제의를 했었으나 토레스는 거절했다. 그렇게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2006/07 시즌에 14골을 터뜨리면서 주장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보여주었으나, 팀이 토레스를 따라가지 못하여 결국 이번에도 유럽대항전 진출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유럽 대항전에 나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다시 한 번 토레스의 향후거취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토레스를 비롯한 다른 아틀레티코 선수들도 거취가 불투명해졌다. 아스날, 첼시,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토레스를 데려가기 위해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고, 영국 언론에서는 이미 토레스가 리버풀 이적이 확정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었다. 구단측에서는 리버풀과 접촉한 적이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했으나, 리버풀과 2500만 파운드에 루이스 가르시아까지 포함되어 토레스 이적이 완료되었고, 그의 대체자로 디에고 포를란이 비야레알에서 비센테 칼데론으로 입성하는 것이 발표나면서 이 금발머리 스트라이커는 2007년 7월 4일을 끝으로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브리튼 섬으로 향했다. 마드리드에서 거병한 '엘 니뇨'의 진출이었다.

 

 

 

승(昇) : 영연방을 휘젓는 붉은 옷을 입은 금발머리의 No.9 의 정복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등번호 9번'과 함께 토레스는 유럽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의 역대 최고 이적료(후에 앤디 캐롤이 토레스의 이적료 기록을 갱신하면서 바뀌었지만)를 기록하면서 안필드로 입성한 페르난도 토레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등번호 9번을 배정받은 그는 8월 11일 아스톤 빌라와의 개막전에서 데뷔하였고, 같은 달 19일인 첼시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리버풀에 녹아들어갔다. 리버풀에서 보내는 첫 시즌에 마이클 오언이 세운 한시즌 최다골(28골)에서 한 골 더 추가하여 갱신하였고, 8경기 리그 연속골까지 기록하면서 로저 헌트의 기록(7경기 연속 득점)까지 갈아엎었다. 게다가 리그 첫시즌에 24골을 쏟아부으면서 루드 반니스텔루이가 세운 EPL 외국인 선수 데뷔 첫시즌 최다골까지 갱신하면서 토레스는 리버풀의 슈퍼스타로 단숨에 치고 올라섰다. 비록 리그 올해의 선수상과 젊은 선수상을 호날두와 파브레가스에게 밀려 차지하지 못했지만, 첫시즌에 보여준 임팩트는 단연컨데 최고였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 충분하였다. 리버풀에서 보여준 상승세를 바탕으로 토레스는 유로 2008 본선에서 2골을 넣었으며 비야와 함께 무적함대의 공격을 책임지면서 팀을 우승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의 첫 우승 트로피였다.

 

  토레스의 상승세는 그 이후에도 줄곧 이어졌고, 2007/08 시즌 FIFA 선정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영광과 2008년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와 더불어 주장인 스티븐 제라드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하여 제-토 라인이라는 조합까지 탄생할 정도였다. 리버풀을 리그 2위로 올려놓고 두 시즌 내내 맹활약을 보인 토레스는 2008/09 시즌이 종료된 후에 재계약을 맺으면서 2013년까지 연장 및 주급을 11만 파운드로 향상시켰다. 한마디로 토레스의 입지가 리버풀 내에서는 그야말로 'Untouchable'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09/10 시즌에도 토레스는 변함없었다. 9월 한 달 간 5골을 기록할 정도로 골결정적은 정점에 다다랐고, 맨유와의 노스트웨스트 더비에서도 득점하여 팀을 승리로 인도했다. 2년 연속 FIFA 선정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역대 리버풀 선수 중 최단 시간 50호골 돌파를 달성하기까지 했다. 무릎 부상으로 2010년 4월 8일 벤피카와의 UEFA컵 경기에서 시즌아웃될 때까지 토레스는 32경기 중 22골을 넣었다.  

 

(26세의 나이에, 메시-호날두도 이루지 못한 월드컵 우승을, 그는 달성했다)

 

  하지만 문제는 토레스가 남아공 월드컵을 두 달을 앞두고 무릎부상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월드컵 우승을 노리는 스페인에게 있어서 상당한 타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토레스는 월드컵 출전일자에 맞추기 위해 부상회복에 초점을 두고 총력전을 펼쳤고, 월드컵 시작에 맞춰 다행히 복귀했다. 월드컵 직전에 잡혀있던 폴란드와의 친선경기에서도 출전하여 득점까지 기록하는 등 건재함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정작 스페인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때 본선에서 토레스는 무득점에 그치면서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토레스를 향한 평가가 절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축구계에 양강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가지지 못했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26세의 나이에 들어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국가대표 선수로써 대륙컵과 월드컵 우승, 이것은 분명이 가치있는 일이다. 

 

 

 

전(轉) : 야망을 위한 유니폼 교체, 하지만 고통과 시련의 연속

 

  화려한 영광과 함께 안필드로 돌아온 페르난도 토레스, 라파엘 베니테즈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로이 호지슨은 "토레스를 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제안을 환영하지 않는다. 우린 그를 지키길 원한다." 라고 밝혔고, 토레스 또한 이에 대한 화답으로 "클럽과 팬에 대한 내 헌신과 충성심은 내가 리버풀과 사인했을 때와 같다." 면서 클럽과의 굳건한 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하지만 2011년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리버풀과 페르난도 토레스, 양 당사자 간의 관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1월 이적시장이 닫히기 직전인 2011년 1월 27일, 토레스가 라리가에서 뛸 때부터 줄곧 노려왔던 첼시가 그를 데려오기 위해 바이아웃 조항금액인 850억원을 오퍼했다. 리버풀은 이 스페인 스트라이커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문제는 토레스가 리버풀 구단을 향하여 서면으로 공식적인 이적요청을 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2010년 8월에 리버풀을 향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던 그의 발언에 모순이 생긴 셈이다.

 

  토레스가 리버풀을 떠나 첼시로 움직이려는 이유는 바로 트로피를 향한 야망이었다. 리버풀 선수로써 그는 웬만한 다른 공격수들보다 훨씬 웃도는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에 밀려서 우승 트로피를 매번 놓쳤다(특히나 우승할 수 있는 적기였던 2008/09 시즌은 토레스 입장에선 두고두고 아쉬웠다). 우승을 향한 열망을 위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리버풀로 이적할 때와 똑같은 이유였다. 해를 거듭할 수록 리버풀도 아틀레티코처럼 우승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2009/10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진출 실패까지 했던 것이 결정타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무릎 부상의 후유증, 국가대표 내에서 다비드 비야를 비롯하여 페르난도 요렌테라는 새로운 경쟁자와의 주전경쟁에서 오는 압박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랬기에 미래가 불투명한 리버풀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첼시의 손길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토레스는 야망을 위해 안필드를 떠났다. 

 

(EPL 최고의 이적료를 갱신하면서 푸른 제국으로 적을 옮긴 토레스, 하지만 그것이 시련의 시작이었으니...)

 

  런던으로 적을 옮긴 토레스, 하지만 자신과의 바람과는 달리 첼시에서의 생활은 말그대로 자신의 커리어에서 시련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푸른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른 경기가 하필이면 전 소속팀인 리버풀과의 경기였고, 선발 출장한 그는 리버풀의 승리를 지켜봐야만 했다. 2월 6일 리버풀전 데뷔를 시작으로 하여 4월 23일 웨스트햄과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할 때까지 그는무려 903분간 무득점이라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더욱 심각한 건, 2010/11 시즌 첼시에서 기록한 유일한 득점이 바로 웨스트햄전이라는 점이다. 그 이후로도 토레스는 자신의 몸값에 걸맞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첼시의 빈공의 원흉이 되어버렸다. 물론 시즌 내내 부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경기력이 올라올 것처럼 보이면 바로 다음 경기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해버렸다. 그러한 반복만 수십 번이어서, 팬들 사이에선 토레스의 경기력을 두고 "시즌 OO번째 부활, 시즌 OO번째 침묵" 이라는 조롱까지 나왔다.

 

  첼시 소속으로 토레스는 학수고대하던 두 개의 유럽대항전 트로피(UEFA 챔피언스리그, 유로파컵)를 들어올렸고, 스페인 국가대표 소속으로 다시 한번 유로 2012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자신이 원하던 야망을 달성했으나, 유로대회에서는 득점왕에 올라섰고, 유로파컵 결승전에서는 벤피카를 상대로 선제골을 뽑아내면서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였으나, 사람들이 그를 향한 평가는 리버풀 시절과는 정반대였다. 첼시 내에서 토레스의 입지는 제1선발이기보단, 로테이션 혹은 후보선수였고 경기를 출장하더라도 자신의 주포지션인 최전방 스트라이커보단 윙포워드나 윙어로 나오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리고 무릎부상 이후, 토레스 특유의 치고 달리는 드리블링과 돌파가 되지 않다보니 토레스의 장점이 사라져가면서 득점도 10골을 넘기질 못했다. 이번시즌 첼시를 떠나 AC밀란으로 팀을 옮겨서 부활을 노렸으나, 10경기 1골에 그치면서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結) : 7년 반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30대 '엘 니뇨(El Niño)', 그리고...?

 

(2007년 여름에 마드리드를 떠났다가 7년 반만에 돌아온 엘 니뇨)

 

  밀라노에서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토레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제안이 들어왔다. 자신이 데뷔했던 고향팀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그에게 돌아오라면서 임대제의를 AC밀란에게 한 것이다. 비센테 칼데론에서 토레스와 함께 경기를 뛰면서 현재 아틀레티코의 감독이기도 한 디에고 시메오네가 토레스가 필요하다고 하여 구단에게 영입 요청을 한 것이다. AC밀란도 때마침 마드리드에서 자리를 못잡고 헤매고 있던 알레시오 체르치를 강력하게 원했던 상황이었고, 양 구단은 토레스-체르치 18개월 임대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그래서 토레스는 반년만에 밀라노 생활을 청산하고 2014년 12월 30일에 마드리드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그가 리버풀로 떠난 지, 거의 7년 반의 복귀였다.

 

  토레스가 비센테 칼데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틀레티코 현지 팬들의 반응은 반신반의였다. 스페인 언론 아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복귀 반대가 50.78%이며 찬성이 49.22%, 그의 복귀가 어떤 결과를 낳을 지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린다는 의미이다. 반대하는 측의 의견은 현재 토레스의 폼이 많이 떨어진데다가 지금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마리오 만주키치를 비롯하여 앙트완 그리즈만, 라울 가르시아와의 주전경쟁 및 호흡 면에서 좋은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찬성하는 측의 의견은 올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많은 경기(챔피언스리그, 리그, 국왕컵)를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스쿼드 두께를 강화시켜야하며 과거 카피탄 출신으로 팀을 이끌었던 전적이 있었기에 다시 한 번 그를 믿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그는 팀 훈련에 합류한 상황이었고, 1월 3일에 있던 레반테와의 홈경기를 관전했다.

 

  토레스 본인에게 있어서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복귀는 정말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그가 고향팀으로 돌아오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굴곡을 경험했고, 현재 그는 정상에서 브레이크 없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반등의 기회를 만들어야만 하는 시점이다. 페르난도 토레스의 선수생활 기승전결 중 현재 '결' 부분에 다다랐다. 과연 선수 본인은 이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 지가 모두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사조처럼 극적으로 부활하여 예전의 그 '엘 니뇨(El Niño)'로 돌아올 수 있을까?

 

 

다 읽으시고, 밑에 있는 공감버튼을 눌러주시면 저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