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중순 리우는 전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던 도시였다.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인의 축제라 불리는 올림픽을 이 곳 리우에서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요 관광지인 예수상이나 파오지아슈가르, 코파카바나 해변 등등 현지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득차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연출하고 있었다. 리우까지 직접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대부분 자국 선수들이 참가하는 종목을 관전하거나, 아니면 이 축제 분위기를 경기장이 아닌 리우 현지에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리우 사람들, 아니 브라질 국민들은 올림픽이 성황리에 끝나느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배구였고, 나머지 하는 바로 그들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올림픽 축구팀의 성적이었다.
(2014년 7월, 미네이랑의 비극은 브라질 축구의 최후라 불릴만큼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2016년은 브라질 축구가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2년 전 자국에서 열렸던 월드컵에서 입은 크나큰 상처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2014년 브라질은 안방에서 여섯번째 별을 달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으나, 8강인 콜롬비아전에서 승리를 얻은 대신 팀의 핵심인 네이마르를 잃었다. 네이마르 없이 올라간 4강에서 독일을 상대로 '미네이랑의 비극' 이라 불리는 7대1 대참패를 당했고, 3,4위전인 네덜란드에게도 완패를 당하면서 브라질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브라질월드컵을 기점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셀레상(Seleção)이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쇠퇴했고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브라질 사람들에게 '축구'라는 일말의 희망까지 앗아가버렸다. 2년이 지난 올해, 브라질 축구협회는 코파아메리카 100주년인 센테나리오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올림픽 남녀축구 우승을 목표로 자존심 회복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내걸었던 목표 중 하나였던 코파 센테나리오는 자존심 회복은 커녕 그들에게 창피함만 안겨다주었다. 대회가 시작하기 이전에 셀레상의 지휘봉을 이미 망친 전례가 있는 둥가에게 그대로 넘겼고, 둥가는 쓸데없는 고집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필요한 자원들이었던 티아구 실바, 마르셀로, 더글라스 코스타, 오스카 등을 철저히 외면하는 실수를 또 한 번 반복했다(오히려 올림픽에 출전할 브라질 대표팀 명단이 코파 아메리카 명단보다 더 화려했다). 결과는 브라질은 토너먼트는 커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고, 결국 둥가는 쫓겨났다. 사람들은 브라질 축구는 더이상 회생불가능하다고 기대를 접었다. 정신적인 데미지를 이미 입을 대로 입은 브라질 사람들은 유일한 희망인 네이마르와 '축구여제' 마르타를 선봉장으로 내세운 남녀 올림픽축구팀이 리우에서 기적을 만들어주길 기도했다.
(브라질 사람들은 슈퍼스타 네이마르(좌)와 마르타(우)에게 금메달이라는 희망을 모두 걸었다)
네이마르와 마르타, 전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슈퍼스타이자 개인 커리어는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그야말로 무결점 그자체였다. 하지만 두 선수에게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한 번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어본 적이 없었다. 네이마르는 4년 전 런던에서 금메달을 코 앞에서 놓치는 불운을 겪었고, 개인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싹쓸이한 마르타는 2004년과 2008년 연이어 은메달에 그쳤다. 이번 대회까지 포함하여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는 마르타는 그 감회가 남달랐다. 30대에 접어든 그녀에게 이번 리우 올림픽이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 있는데다가 자국에서 열렸고, 게다가 메이저대회에서 브라질 여자대표팀이 단 한 번도 우승을 거머쥔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조국에게 기필코 금메달을 안겨야한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네이마르 또한 이번 대회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출전했는데, 단 한 번도 금메달과 인연 없던 남자축구팀에 챔피언에 가져다주기 위해 코파 아메리카 차출까지 제외시키는 모험수를 걸었기 때문이다.
브라질 올림픽 남녀대표팀은 출발부터 달랐다. 남자대표팀은 비교적 쉬운 상대들과 한 조에 묶였으나, 마지막 조별경기였던 덴마크전 이전까지는 이기지 못하면서 센테나리오의 악몽을 한 번 더 재현시킬 뻔 하였다. 반면, 여자대표팀의 경우에는 강호인 중국과 스웨덴이 한 조에 묶이면서 진출조차 장담못했으나, 2승 1무로 선전하여 조 1위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토너먼트에서 남녀대표팀의 운명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덴마크전을 기점으로 남자대표팀은 콜롬비아와 온두라스를 연이어 격파하면서 과거 브라질 특유의 화끈한 공격력이 살아났고, 네이마르는 그 중심에 서서 직접 득점보다는 이타적인 플레이를 기반으로 팀을 결승까지 끌고 올라갔다. 차기 바르샤와 셀레상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확실히 증명해보였다. 반면 여자대표팀은 8강부터 고전의 연속이었다. 호주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접전 끝에 겨우 올라갔으나, 4강에서 다시 만난 스웨덴과의 경기도 승부차기까지 가는 피말리는 접전을 펼쳤다. 승리의 여신은 마르타를 끝내 저버렸고, 여자대표팀은 4강에서 멈추었다. 그 이후 열린 3,4위전에서 브라질은 캐나다에게 1대2로 패하면서 최종성적 4위로 마감했다.
('축구여제' 마르타의 인터뷰와 눈물은 브라질 사람들을 크게 울렸다)
3,4위전이 끝난 후, 스포트라이트는 동메달을 거머쥔 캐나다 대표팀이 아닌 브라질 대표팀 주장인 마르타에게 향했다.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가 그녀의 한마디를 기다렸고, 그녀가 눈물을 보이면서 매체를 통해 한 말은 브라질 사람들을 크게 울렸다.
"첫 경기때부터 많은 응원을 보내준 팬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다. 나는 이 지지가 여기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스포츠, 그리고 셀레상을 꿈꾸는 소녀들에게 있어서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를 믿어주길 바란다."
8월 20일 토요일, 브라질의 성지로 불리는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은 오후부터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고 있었지만, 이 소나기조차도 거대한 노란물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마라카낭은 성지로 불리지만, 지난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때 '마라카낭의 비극(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게 패배하였다)' 이라는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 그들은 내심 불안해 하고 있었다. 결승상대가 하필이면 2년 전 브라질에게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독일 올림픽대표팀은 남녀 통틀어 무서운 기세를 보여왔다. 여자대표팀은 엊그제 우승을 차지했고, 남자대표팀은 이번에 참가팀 중 평균연령이 가장 어린데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점이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 셀레상에는 네이마르가 버티고 있다는 게 희망적이다.
(이 곳이 브라질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마라카낭 스타디움, 나도 평생 올까 말까한 곳을 드디어 밟았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소나기는 그쳤다. 소나기를 충분히 머금었는 지, 잔디 또한 유난히 윤기가 흘렀다. 좌석은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다. 아직 경기 시작하기 한참 남았음에도 마라카낭은 벌써부터 들떠있었다. 한국과 브라질의 차이점을 하나 꼽자면, 한국의 경우 A매치 경기가 있거나 하면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가 서포팅을 직접 진두지휘하여 응원열기를 북돋지만, 브라질은 서포터가 아닌 일반 관중 아무나 자신들의 서포팅곡을 부르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단체로 부르기 시작해 어느새 경기장 전역에서 울려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즉, 브라질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응원가를 다 알고 있으며 정해진 틀 없이자유분방하게 시작했다.
(브라질사람들의 흔한 서포팅, 누구나 먼저 시작하면 모두가 다 따라한다. 역시 축구에 미친 나라 다웠다.)
(AGAIN 2014가 될 것이냐, 아니면 복수극이 될 것이냐. 마지막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브라질은 주장인 네이마르와 브라질 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예들 3인방(루안, 가브리엘 바르보사, 가브리엘 제수스)을 앞세워 경기 시작부터 독일을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재 축구 끝판왕" 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어린 전차군단 선수들은 7만명 넘는 노란 물결에도 동요되기는 커녕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방어하면서 역습할 기회를 노렸다. 양 팀이 초반부터 엄청난 압박과 높은 속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선보이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갈증을 유발시켰다. 마라카낭 내에선 휘슬소리와 플라스틱 의자가 펴졌다가 접히는 소리, 그리고 브라질 사람들의 육성만이 들렸다.
(전반 27분, 슈퍼스타 네이마르가 직접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고(위), 그 골로 인해 달아오른 마라카낭(아래))
전반 27분, 브라질에게 프리킥 기회가 왔다. 키커는 네이마르. 그가 공 앞에 서는 순간, 내 근처에 앉았던 몇몇 사람들은 골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네이마르가 완벽하게 골문 구석을 노려 그림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4강전 이후부터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까지 브라질 사람들이 진정 원하던 모습을 이 자리에서 네이마르가 보여준 것이다. 에이스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말이다. 사람들은 네이마르를 위한 서포팅곡까지 부르면서 마라카낭은 그야말로 쉬지 않는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
후반 14분에 독일의 에이스인 막시밀리안 마이어에게 동점골을 먹혔으나, 분위기가 꺾이기는 커녕, 오히려 '오늘 독일을 끝장내버리겠다' 는 듯한 일념 하나로 브라질 선수들은 더 공격적으로 덤벼들었고 브라질 사람들 또한 더 미친듯이 자기 자리에서 뛰면서 브라질 응원곡을 불렀다. 내 옆에 앉아있던 브라질 부부는 "우리에게 네이마르가 있기 때문에 절대 질 수가 없다.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는 강한 신념을 보였다. 마치 우리가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박지성을 전적으로 믿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브라질은 더욱 더 독일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면서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과거 브라질이 자랑하던 공격축구가 이 마라카낭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독일 또한 남녀 대표팀 모두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로 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 속에서도 끝까지 버텼다. 연장전으로 넘어가서는 일방적인 브라질의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독일은 배수진을 친다는 심정으로 모두 막아냈다. 그리고 역습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숨통을 조였지만, 무려 세 번이나 골대를 맞추며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결국 120분 모두 소비하고 승부차기로 결판내야만 했다.
독일의 선공으로 승부차기가 시작되었고, 1번 키커인 마티아스 긴터가 먼저 골문을 가르면서 독일이 앞서갔다. 곧바로 브라질도 헤나토 아우구스토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뒤이어 각 팀의 2~4번 키커였던 세르쥬 나브리, 니클라스 쉴레와 줄리안 블란트(이상 독일), 마르퀴뇨스, 하피냐, 루안(이상 브라질)이 골망을 갈랐다. 어느덧 5번 키커들의 차례, 독일에선 닐스 페테르센이 나와 골문과의 11m 거리에서 슈팅을 했지만, 키퍼인 베베르톤의 손에 막혔다. 행운의 여신이 끝끝내 독일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 브라질에선 마지막 키커로 네이마르가 나섰다.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네이마르의 오른발로 그토록 갈망했던 축구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네이마르는 침착하게 오른쪽 구석을 향해 정확하게 차면서 경기를 끝냈다. 네이마르의 골과 함께 마라카낭은 더이상 통제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들이 그토록 꿈꿔왔던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이 곳 마라카낭에서 쟁취한 것이다. 펠레도, 호마리우도, 호나우두도 달성하지 못한 이 원대한 꿈을 네이마르가 완성시켰다. 그리고 네이마르 덕분에 브라질은 더이상 마라카낭의 악몽에서 시달리지 않았다. 그의 오른발에 의해 그들의 발목을 오랫동안 붙잡았던 악령은 저 멀리 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을 했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니었나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 결승전을 통해서 평소에 네이마르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편견들이 완전히 깨졌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네이마르의 이미지는 '이타적인 모습보다는 직접 해결하려는' 모습이 강한 선수로 많이들 알고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오해했었다. 결승전에서 보여주었던 네이마르는 팀 승리를 위해 헌신하는 그 자체였다. 직접 슈팅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 위치에서 이 슈퍼스타는 동료들에게 킬패스를 제공하면서 더 위협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비록 이 경기가 네이마르가 결정짓긴 했으나, 그의 이타적인 모습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이 그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셈이었다.
가뜩이나 금요일 밤부터 주말 내내 전세계에서 가장 시끄럽기로 소문난 리우였는데, 올림픽과 브라질 대표팀의 금메달 소식에 리우는 그야말로 광란의 파티였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 근처가 그 중에서도 가장 핫플레이스인 센트로-라파 지역의 경계선이었다. 얼마나 기뻤으면, 승용차는 물론 버스조차도 통과하지 못하고 수천명의 즉흥적인 카니발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이 날은 인파 속에 오가지도 못하던 운전자들과 버스 기사, 버스를 탄 승객들도 덩실덩실 춤췄다.
(흔한 올림픽 우승 후, 리우 센트로-라파 지역에서 보는 카니발)
브라질에게 이 올림픽 우승은 크나큰 의미로 작용할 것이다. 하나는 그동안 축구계에서 하락쇠니 퇴물이니 평가받기 시작하던 그들에게 반등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현재 힘든 경제난과 흉흉한 사회소식에 찌들어있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잠시 기댈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브라질 축구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2016년 8월 2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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