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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는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J_Hyun_World 2011. 10. 28. 08:00

 

 

 

 

  지난 8월 어느 주말, 나는 가족들과 함께 화성시 능동에 위치한 어느 낙지집에서 저녁 외식을 하게 되었다. 그 낙지집은 다른 일반 낙지집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낙지집에는 한국 축구계의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인 '시리우스' 이관우가 직접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유명인의 이름을 내건 식당들을 방문하면 정작 유명인들은 가게가 종종 얼굴을 비치곤 하는데 반해, 낙지집 사장님인 이관우는 매일 나와 셔터 문 내릴때까지 자신이 직접 손님들에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정말 좋은 마인드다). '아, 내가 좋아했던 이관우를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식사를 하던 도중에 힐끔힐끔 이관우를 쳐다보곤 했다. 내가 힐끔힐끔 쳐다볼 때마다, 그는 손님들에게 싸인을 해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주기에 바빴다. 그렇다, 손님들 중 나처럼 그를 보기 위해 그의 식당을 직접 방문한 축구팬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한결같이 이러한 질문을 물었다. '이제 그라운드에선 볼 수 없나요?' 혹은 '곧 복귀하시는거죠?' 라고. 그럴때마다 시리우스의 대답은 '곧 돌아갈껍니다^^' 라면서 밝은 모습으로 대답해주었다. 식사를 하던 중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이관우는 은퇴한거냐?'라고. 이에 나는 '은퇴는 아닙니다. 다만, 팀을 못구했어요.'라고 답변을 했지만, 왠지모를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식사 후, 이관우와 사진을 찍고 나온 뒤에도 이 안타까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타고난 천재 플레이메이커, '시리우스' 이관우,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았던 부상

 

(한국 '천재 미드필더' 계보의 한 종파인 '시리우스' 이관우, 그는 타고난 플레이메이커였다)

 

  이관우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되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4,5년전, 1997년 청소년대표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당시 우리나라 청소년대표팀은 1997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브라질에게 3대10이라는 최다실점으로 패하면서 브라질의 스파링상대가 되어버렸지만, 그 대회 우승팀인 브라질에게 유일하게 3골을 꽂아넣은 팀 또한 한국 밖에 없었다. 그 굴욕 속에서도 이관우는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질을 상대로 특출난 드리블과 감각적인 킬패스와 조율능력, 그리고 세트피스에 빛나는 프리키커능력까지. 이렇게 이관우는 기자들의 뇌리속에 강렬하게 남았다(이후 코엘류 감독은 그가 포르투갈에서 태어났다면, 루이 코스타에 버금가는 재능으로 성장했을 것이라며 극찬했다). 그리고 1999년 시드니올림픽 예선전에서 그의 진가가 확실히 드러났다. 당시, 올림픽 예선전 멤버로는 이관우 이외에 이영표, 이천수,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 박지성, 고종수, 김용대, 심재원, 박동혁, 박진섭 등등 현재 황금시대 못지 않게 화려한 스쿼드를 꾸리고 있었고, 이관우는 시드니 올림픽 본선진출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선수 중 한명이었다. 그 기세로 그는 2000년 1월 23일 뉴질랜드와의 A매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하지만, 이러한 천재의 등장을 시셈했던 것인지, 이관우는 2000년 4월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오른쪽 발목을 부상당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오른쪽 발목에는 지금도 철심이 박혀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큰 무릎부상까지 당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면서 결국 2000년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대표팀에서 이관우의 잔혹사는 계속되었다. 2002년 월드컵 때에는 부상으로 히딩크사단이 4강신화를 일궈냈을 때, TV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움베르투 쿠엘류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나서 다시 대표팀에 호출되어 이제 만회를 해보는가 싶었으나, 2004년 아시안컵에서 훈련 도중 부상을 입는 바람에 또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 이후로 4년 뒤인 2008년, 허정무 감독이 다시 그를 호출했지만, 그는 클럽에서 보여주던 것과는 달리 대표팀에서는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이관우의 대표팀의 커리어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대전과 수원의 별' 이 된 시리우스

 

   K리그 내에서 이관우라는 존재는 대표팀에서 보다 더욱 빛나고 거대한 산맥과도 같았다. 1999년 J리그팀인 아비스파 후쿠오카와 계약성사직전까지 갔으나, 이듬해인 2000년 느닷없이 전체 드래프트 2순위로 대전에 지명됨으로써 J리그행을 포기하고 대전에 입단하게 되었다(그당시 드래프트 1순위는 이영표였다).  당시 대전은 위기에 직면해있던 상태였다. 당시 대전의 메인 보드 역할을 하던 기업인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이 IMF 사태로 파산하면서 대전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1999년에는 18패라는 리그최다패 불명예까지 떠앉고 있었다.

 

  이관우의 합류는 대전에게 있어서 '1+α' 그 이상의 시너지효과였다. 당시 대전의 주포였던 김은중의 최고의 파트너로 부상하면서 올림픽 대표시절을 연상케 하는 콤비 플레이로 대전 팬들을 단번에 사로잡는 데 성공하면서 입단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대전의 별'로 떠올랐다. 지단을 빙의케 하는 턴능력과 턴 뒤에 바로 저격수처럼 정확하게 찔러주는 킬패스는 가히 압권이었다. 그렇게 김은중과 환상의 짝궁이 된 이관우는 2001년 FA컵 우승을 대전과 이태호 감독에게 안겨주면서 대전은 첫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퍼플아레나로 둥지를 옮기고 2003년 대전 출신이자 유공의 수비수로 날렸던 최윤겸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이관우와 대전의 가치는 더더욱 빛났다(이때가 바로 대전의 '기적의 2003년'). 최윤겸 감독의 빠른 4-3-3 전술에 선봉장이었던 이관우는 플레이메이커로써 대전 중원을 진두지휘했으며, 대전의 홈승률 1위와 주중 최다관중을 몰고다니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울산전에서 대전 최다 관중 기록이자 K리그 최초 관중 만원 기록(44370명)을 갱신하였고, 이렇게 이관우의 대전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4년, 환상의 파트너를 구축하던 김은중이 서울로 이적함으로써 대전의 위력은 크게 반감되었고, 이관우도 그 이후로 고군분투하게 되었다.

 

(2006년 여름, 이관우의 수원 이적으로 대전과 수원 양 구단이 더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버렸다)

 

  2006년 여름, 이관우는 또하나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수원으로의 이적이었다. 2006년 3월 전북과의 경기에서 20-20 클럽을 달성한 이관우는 이 해 여름, 수원으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대전 구단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고, 퍼플크루는 그에 대해서 상당히 실망하였다. 껄끄러운 이적과정으로 왔기에 그가 수원으로 와서도 처음부터 그랑블루에게 신임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안그래도 수원은 대전징크스를 가지고 있는데, 대전 선수가 수원에 왔으니 뭔가 찝찝한 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결정적으로 팬들의 신임을 받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2006년 8월 23일 서울 원정경기였다. 1대0으로 끌려가던 수원은 이관우의 극적인 오른발 시저스킥으로 동점을 만들어냈고, 이때 이관우는 수원팬들을 향한 거수경례 세레모니를 하면서 일종에 '수원만을 향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이관우가 이적한 해인 2006년에 수원은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2007년에 차범근 감독은 수원에 온지 이제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이관우에게 주장완장을 넘겨주었다(그만큼 그에 대한 감독의 신뢰가 엄청났다는 의미다). 그렇게 이관우는 2006, 2007년 'K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고, 2007년 8월 25일 대구 원정에서 개인 통산 30-30 클럽에 가입했고, 그 다음해인 2008년에는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리그 우승을 수원에 와서 맛볼 수 있었다. 2001년 FA컵 우승 타이틀 이후 7년만에 새긴 메이저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관우는 수원에서 '계륵'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유는 바로 올림픽대표팀 시절부터 줄곧 그의 발목을 잡아왔던 부상 때문이었다. 확실히 기량 면에서는 어떤 누구도 이의제기할 수 없을 만큼 타고난 플레이메이커였으나, 2008년 이후 두시즌 간 부상으로 인해 8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가 한 경기 나올때마다 '1억인 귀하신 몸'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했다. 수원의 플레이메이커들(이관우, 백지훈)이 하나같이 유리몸이다보니 수원입장에선 상당히 갑갑했을 것이다. 이 떄문에 결국 2010년 시즌이 끝나고 수원은 더이상 이관우를 잡지 않으며, 상호해지하게 되었다.

 

 

 

'나는 은퇴하지 않았다, 아직도 뛰고 싶다'

 

  이관우가 현재 직접 낙지집을 운영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사업에 뛰어든 것인줄 착각하고 있다(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관우는 은퇴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 팀이 없는 무적선수일 뿐이다(지금 국내에서 개인훈련하면서 팀을 구하고 있는 이영표와 같은 처지이다). 그리고 요즘에서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수원과 계약해지 이후에 대전이 이관우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무산되었다고 한다(대전팬들이 많이 아쉬워할 대목이다). 그의 현재 몸상태를 보자면, 8월에 내가 그의 낙지집을 방문했을 때 확실히 괜찮았던 것 같다. 다만, 올해들어서 거의 개인훈련을 하지 않았기 떄문에 경기감각면에서 조금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선수시절에도 오랜 부상기간을 거치고 컴백할 때도 경기감각이 떨어졌는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년에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를 노리는 K리그 클럽들도 여럿 된다(그 중에 이관우는 수원과 대전, 이 두 팀에서 다시 뛰었으면 좋겠다고 자기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하지만,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하는 데 문제는 바로 30대중반의 인저리프론인만큼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고액연봉자라는 점이 팀을 찾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난 3월 프로축구연맹에서 사상 2번째로 이관우를 연봉 조정할 것이라는 움직임도 내비췄었다. 20번 이상 연봉조정을 했었던 프로야구와는 달리 축구는 연맹에서 직접 나서 연봉 조정을 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야구와 달리 축구는 선수 본인이 아닌 에이전트가 선수를 대리하여 계약을 처리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연맹에서 직접 나서는 것은 바로 이관우를 직접 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수원과 이관우 사이를 주선하려고 했던 것이다(그 이후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연봉조정을 위해 대면한 것 같지 않다만...).

 

    그의 나이, 이제 만 33세. 선수로써 아직 뛸 수 있는 충분한 나이다. 얼마전에 은퇴한 '을용타' 이을용도 만 36세에 은퇴했고, 경남의 골키퍼인 김병지는 불혹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역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포항의 '철인'인 김기동은 김병지에 이어 두번째로 통산 500경기 출장을 기록함으로써 40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끔 하고 있다. 해외만 보더라도 유벤투스의 주장인 '판타지스타' 델피에로도 아직 건재하지 않던가? 이러한 천부적인 테크니션의 플레이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축구팬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으며, 나에게 있어서 정말 좋아했던 선수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얼마 전 비바K리그 라커룸 코너에서 이관우는 이렇게 말했다. "공차는 모습을 보면 폭발할 것 같다"고. 그렇다. 그는 아직 축구를 향한 열정이 강하게 남아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돌아올 준비가 되어있다. 새카만 밤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시리우스. 그 별은 아직 지지 않았다. 내년에 그 시리우스가 그라운드에서 다시 빛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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