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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클래식 더비 동해안 더비를 화끈하게 불지폈던 인물열전

J_Hyun_World 2012. 3. 2. 08:00

 

 

 

 

 

 

  이제 하루가 지나면, 2012년 새로운 K리그 시즌이 시작된다. 올해부터는 승강제가 적용되고 일시적으로 스플릿제도까지 도입되기 때문에 K리그가 역대 한시즌 최다 경기수를 치룰 것으로 보인다(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출전한 팀들은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할 운명이다).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큰 2012년 시즌이다보니 개막전에 치뤄질 경기부터 아주 화끈하게 잡혀져 있다. 3월 3일 개막전에는 아예 아챔 진출한 4팀을 서로 붙여놓았다(아무래도 6일, 7일 아챔 일정 때문에 앞당긴 감도 적잖다). 그러한 이유로 개막전에 리그챔피언인 전북과 FA컵 챔피언인 성남이 맞붙고, 나머지 경기는 K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더비이자 FIFA에서  인정한 더비인 동해안 더비(울산-포항)가 성사되었다.

 

  사실 K리그하면 가장 수많은 역사와 사건사고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동해안 더비인데, 의외로 언론은 이 동해안더비를 주목하질 않는다. 자그마치 K리그와 가장 오랫동안 해온 이 더비를 말이다(심지어 FIFA에서 공식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신 언론은 이 동해안더비 대신에 수도권에 있는 'ㅅㅇ'더비(수원-서울)를 띄워주고 있지만, 사실 이 더비는 언론에서 띄워주는 것만큼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며 이야깃거리도 그렇게 많은 게 아니다(지지대더비의 연장선상이라고 연결짓곤 하는데, 사실 지지대더비와 ㅅㅇ더비는 별개로 봐야 한다). 이에 반해 동해안더비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고,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 인물열전에 대해서 한 번 쓰려고 한다.

 

 

 

동해안 더비를 불지폈던 인물열전

 

 

1. 김병지(울산 : 1992~2000 / 포항 : 2001~2005)

 

(90년대 K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군림하며 울산을 이끌었던 김병지(가운데). 포항을 상대로 병주고 약주고 한 대표적 케이스)

 

  동해안 더비에 가장 먼저 불지폈던 인물은 바로 울산(1992~2000)과 포항(2001~2005)에서 뛰며 현재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우는 골키퍼 김병지다. 김병지는 1992년 당시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했던 최인영의 서브로 입단하다 2년 만에 최인영 골키퍼를 제치고 울산의 주전 수문장으로 도약했다(당시 김병지는 25경기에서 19실점을 허용하며, 경기당 평균 0.76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김병지는 외국인인 신의손 골키퍼와 함께 K리그를 대표하는 수문장으로 발돋움했고, 울산에서 보여줬던 활약 덕분에 1995년에 국가대표유니폼을 입을 수 있게 되었으며, 1996년 아시안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 주전 골키퍼로 자리잡았다. 국가대표에서 활약하는 동안, 김병지는 울산 주전 골키퍼로서 1996년 팀에게 리그 챔피언을 안겨다주었고, 1998년 준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김병지가 동해안 더비에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8년 리그 플레이오프전 포항과의 경기였다. 당시, 포항원정에서 3대2로 지고 있던 울산은 2차전인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후반 46분 코너킥 찬스에서, 공격에 가담하여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포항의 진출로 끝날 것만 같던 플레이오프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연장전 30분 동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까지 간 상황에서 김병지는 선방쇼까지 보여주면서 포항에게 제대로 빅엿을 선사하며,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14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봐도 그 때 당시 상황은 울산에게는 짜릿한 역전드라마였고, 포항에게는 악몽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골키퍼 왕국'인 울산에서 굳건히 주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병지는 갑작스럽게 2001년 울산의 최대 라이벌인 포항으로 깜짝 이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팀 내에서 가장 사랑받던 선수가 뜬금없이 최대의 적의 진영에 투항한 셈이었으니, 울산팬들은 집단 멘탈붕괴에 빠지면서 뭔가 크게 뒤동수를 쎄게 맞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며, 김병지의 공백 때문에 울산은 졸지에 강점으로 손꼽히던 골키퍼 포지션이 취약점이 되어버렸다. 반면, 최대 라이벌 팀에서 뜻하지 않은 핵심선수가 자신들의 팀으로 왔으니 포항 입장에선 그야말로 쾌재를 불렀다. 특히나, 김병지가 울산전에서 아주 좋은 선방쇼를 펼쳐주고 있으니 포항 입장에선 아주 고소했던 것이다. 그러한 김병지를 안고 포항은 2004년에 수원과 챔피언 자리를 다투기도 했었다. 포항에서 활약하던 김병지는 2006년 서울로 상경했다.

 

 

2. 오범석 (포항 : 2003~2007 / 울산 : 2008~2010)

 

(울산 로컬 출신으로 포항 유스로 입단한 오범석, 여기서 뭔가 냄새가 난다? 킁킁- 사진출처 스포츠조선)

 

  김병지 이후에도 동해안 더비를 크게 작용했던 인물들이 더 있었는데, 그 중에 특이한 케이스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범석이다. 오범석은 원래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자란 울산 로컬출신이다(그의 아버지는 당시 울산 학성고 감독이었다). 당연히 울산 출신이기에 프로팀 또한 울산 유스산하인 현대고나 아니면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학성고로 갈거라 예상했으나,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항 유스인 포항제철고로 스카웃되어 포항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포항에서 지원해준 브라질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렇게 포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범석은 2003년에 프로팀으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파리아스 체제에서 거의 에이스급으로 분류되면서 차세대 스타플레이어로 미리 예약했다.

 

  하지만, 이러한 포항에서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바로  오범석이 구단에 이적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핵심전력이었기에 포항 입장에선 국내 이적은 NFS 선언을 하는 게 당연했고, 그 대신 해외로 이적시켜주겠다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오범석이 요코하마 FC로 임대를 떠나는 사이에, 포항이 그 해 리그 우승과 FA컵 준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오른쪽 풀백이었던 최효진의 맹활약이 돋보였다. 이렇게 최효진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기에 포항은 오범석을 그가 원하는 대로 수도권 팀으로 이적시키기 위해 성남과 트레이드 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오범석은 돌연 성남행이 아닌 러시아 진출이라는 포항구단을 제대로 뒤통수 치는 행동을 보였다(사실 오범석 또한 성남행을 알고 있었지만, 오범석의 에이전트는 오범석이 러시아로 진출하게 될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를 수차례 뿌렸다). 포항과 성남, 사마라 이 3개의 클럽이 끼면서 첨예한 대립구도를 펼치다 우여곡절 끝에 오범석은 성남이 아닌 러시아로 날아가게 되었고, 포항팬들은 오범석을 "비열한 배신자"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그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시끄럽게 러시아로 떠난 오범석의 활약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여름, 돌연 K리그로 돌아올 것이라는 루머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면서 오범석이 성남으로 갈 것이라는 의견이 꽤나 지배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범석이 국내 리턴의 거점으로 삼은 구단이 다름 아닌 포항과 가장 사이가 안좋은 최대라이벌이자 자신의 고향인 울산이었다. 가뜩이나 두 번의 이적파동으로 오범석이라는 이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포항팬들이었는데 그가 하필이면 울산으로 이적했으니, 포항이라는 호적에서 오범석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파내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울산도 당시 빈약한 오른쪽 풀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며, 오범석이 울산에서 머문 2시즌 간 나름 잘 커버하기도 했다. 오범석이 울산으로 돌아온 이후, 동해안 더비는 김병지에 이어 오범석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제대로 불타올랐다.

 

 

3. 이진호(울산 : 2003~2010, 2011 / 포항 : 2010) & 노병준(포항 : 2008~2010, 2011~ / 울산 : 2010)

 

 

(2010년 여름에 이뤄진 이상한 맞임대트레이드 이진호(위)↔노병준(아래). 사진출처 : 베스트일레븐)

 

  이렇게 매 고비 때마다 서로의 발목을 잡는 울산과 포항이지만, 서로에게 의외로 친절(?)한 면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2010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이뤄졌던 이상한 맞임대트레이드가 그렇다. 당시 2010년 그 해 여름, 갑자기 이 트레이드가 왜 일어난건지 모르겠는데(아무래도 김호곤 감독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이 된다), 울산과 포항에서 상징적인 선수였던 이진호와 노병준이 6개월간 맞임대 트레이드가 되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울산 로컬보이이자, 유상철 이후로 원클럽맨으로 자리잡으면 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지노신' 이진호와 포항에서 슈퍼서브로 언제나 포항의 필승카드로 손꼽히며 포항에서 신임을 얻던 노병준이었으니, 이건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다.

 

  이렇게 맞임대된 선수들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양 팀 서포터즈에게서 상당히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는 것이다(이건 무슨 평화무드입니까?). 터프하게 생긴 이미지와 달리 예의바르고 공손하기로 유명한 이진호는 비록 최대의 라이벌 팀일지라도 실력이면 실력, 매너라면 매너, 포항팬들에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포항팬들에게서 '포항의 양아들'이라는 수식어까지 받았다. 노병준 또한 울산에서 6개월동안 임대신분으로 뛰는 동안, 울산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참고로 노병준도 울산이 고향이었다. 아마 이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 두 선수 때문에 그동안 서로 죽이기 못해 안달났던 이 웬수가문은 마치 로미오-줄리엣 커플로 인해 사랑과 우정의 무드로 잠시 빠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는 개뿔 그런거 없었다). 좀처럼 맞지 않던 양 팀 팬들은 이 두 선수로 약간 공감대가 형성하긴 했다.

 

  6개월 임대 후, 두 선수의 팀 내 위상은 전혀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김호곤 감독과 불편한 관계였던 이진호는 아예 포항으로 완전 이적하려고 시도했으나, 많은 출전시간 보장이라는 감독의 만류로 극적인 울산 잔류를 택했지만 감독의 약속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2011 시즌 이진호는 선발은 커녕 교체로 나오는 횟수가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상처로 다시 배신당한 이진호는 결국 이근호의 보상선수격으로 대구로 이적하게 되었다. 반면, 노병준의 경우에는 황선홍 감독 체제에서도 변함없이 슈퍼서브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특히나, FA컵 8강전에서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선보엿던 그의 맹활약은 황선홍 감독에게 큰 믿음을 주었던 대표적인 경기가 아니었나 싶다.

 

 

4. 설기현 (포항 : 2010 / 울산 : 2011)

 

(2011년 동해안 더비의 핫 피플로 선정되었던 설기현, 그 덕분에 작년 동해안 더비는 쫄깃쫄깃한 맛이 가득했다)

 

  이진호-노병준의 이상한 맞임대트레이드가 이뤄지고 나고 반년 뒤인 2011년 2월말, 이진호-노병준에 의해 약간의 화해 및 평화무드로 갈 것 같던 울산과 포항의 관계는 마치 일촉즉발의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로 돌아서버리게 되었다. 그것도 한 선수의 이적 때문에 말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설기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레딩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한 포스를 내뿜으면서 박지성과 같이 기대되는 해외파였던 설기현이었으나, 풀햄의 로이 호지슨 감독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서 사우디 클럽인 알 힐랄로 임대되는 등 암흑기를 보내다가 2010년 연초에 풀햄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K리그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포항은 그를 처음부터 활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식 첫경기인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전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 부상은 3월즈음이면 완전회복할 줄 알았으나, 훈련에서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2010년 반시즌을 부상때문에 날려버렸다(여기서 포항팬들의 분노게이지가 어느정도 찬 상태였다).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주전 공격수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기대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특히나 아챔 토너먼트에서 조바한과의 8강 경기에서 조바한에게 '조바한니가결승가라' 슈팅을 때리면서 그동안 포항팬들이 축적해두었던 온갖 욕을 설기현이 먹었어야만 했다. 이렇게 설기현은 포항에서 하루 아침에 '역적' 신분에 먹튀가 되어버렸다.

 

  이러던 설기현은 2011년 2월, 갑작스레 포항을 떠나 울산으로 이적해버리면서 포항팬들의 뒤통수를 또 한 번 후려쳤다. 그가 자신의 연봉을 30%나 자진삭감해서 굳이 울산으로 팀을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미운 정이라고 설기현의 생일케이크까지 챙겨줬던 포항팬들은 집단 멘탈붕괴상태였고, 4월에 가졌던 첫 동해안더비에서 설기현을 향하여 손해배상청구서걸개를 내걸면서 그를 심하게 야유했다. 그러한 야유를 받던 설기현은 7개월 뒤인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을 상대로 페널티 킥 결승골을 꽂아넣으면서 포항에게 결정적인 빅엿을 먹이며 울산의 리그 준우승 및 리그컵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1년간 울산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설기현은 1년만에 다시 팀을 옮겨야만 했는데 울산이 터무니없는 낮은 액수와 기간으로 재계약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1년 만에 인천으로 떠남으로써 설기현 SAGA는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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