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내가 축구에 빠져든 지도 올해 딱 20년을 채운 것 같다. 그만큼 시간이 오랫동안 흘러갔다(어후 이 축덕 냄새 심하게 풍기는 왕덕후야). 그러고보면 내가 왜 축구라는 공놀이에 빠져서 두 번 다시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본 결과, 그 당시 우리집 바로 앞에 울산 공설운동장이 떡하니 있었던 것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싶었고, 그러한 이유로 그 때 이후로 20년 동안 줄곧 울산을 지지해왔던 것 같다(생각해보면 나도 나름 울산 올드팬 축에 속한다. 물론 도중에 못봤던 적도 약간씩 끼어있긴 하다만). 그래서 내 삶을 바꿔놓았던 울산이라는 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울산도 어느덧 팀이 생긴지 30년이 다되어가는(1983년 창단)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나, 그 30년 가까운 역사에서 리그를 제패했던 적이 딱 2번, 운도 지지리 없어서 준우승만 머물렀던 것이 무려 7번이나 되니 이만하면 K리그의 '콩구단'이 아닌가 싶을정도다(여기서 2번만 우승했어도 참;;). 이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울산에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거쳐갔지만, 정작 레전드로 꼽을만한 선수가 누가 있냐고 말한다면 의외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선수들 대부분이 '거쳐가는 클럽'으로 인식을 한건지 울산을 발판으로 다른 팀으로 떠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울산을 대표하는 레전드가 그만큼 더 귀하고 생각보다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선수를 꼽자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선수를 언급하고 싶다. 바로 '유비' 유상철이다. 유상철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울산골수팬으로 자리잡았을 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1. '유비' 유상철
1. 허약체질 개선을 위해 신었던 축구화, 선수로써 꿈을 키우다
184cm 78kg(선수시절 프로필)의 체격으로 몸싸움에서 웬만한 유럽 선수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이지만, 어렸을 때는 아주 정반대였다. 어렸을 적 유상철은 유난히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키도 작고 비쩍 말라서 운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축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기 보단 허약체질을 개선해서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 어머니의 권유였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경신중-경신고를 거쳐서 축구선수로써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의 작은 키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경신고에 진학하고 나서 1학년 때 당시 감독이 축구를 그만두라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이 권유가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던 것인지 그해 겨율 합숙훈련에 합류하는 대신에 두달간 보약을 보충하면서 체력을 키워나갔고 그 노력의 정성이 빛을 발했던 것인지 고2때부터 키가 자라 2년 사이에 20cm나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눈에 띌 정도로 부각되진 않았으나 팀플레이에 능했던 덕분에 유상철은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U-19 AFC대회 챔피언쉽에 한국대표팀으로 뽑혔으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크나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은 1991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진출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 단일 대표팀이 결성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유상철은 청소년대표팀 엔트리에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유상철은 경신고를 거쳐 건국대학교로 진학한 후에 1994년에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게 되는데, 그가 데뷔한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인 서울팀이 아니라 울산이었다.
2. '유비' 유상철,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기다(1994~1997)
(1994~1998년까지 울산시절의 유상철, 그의 등장은 한국축구계의 큰 획을 그었다)
사실 유상철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로컬이었기 때문에 프로팀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을 원했었으나 울산이 드래프트 1순위로 유상철을 택했다. K리그가 개막하기 전에 그는 94년 미국월드컵 대표팀 전지훈련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들어간 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되었고,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A매치 데뷔무대를 가지기도 했다(아쉽게도 94 미국월드컵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는 울산에서 우측 수비수로 처음 프로데뷔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수비수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덕분에 그는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할 수 있었던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에 선발되었다.
(프로 초년생 유상철이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한국은 3대2 역전승을 거두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은 유상철 이름 석자를 대한민국에 처음 부각시켰던 경기였다. 당시 8강전은 한일전이었기 때문에 분위기상으로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던 무대였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1대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정국의 힐패스를 이어받은 유상철은 오른발 발등으로 공을 골대로 밀어넣으면서 동점골을 뽑아냈고,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을 계속 몰아치다가 결국 3대2 역전승을 거두며 아시안게임 4강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상철이 '한일전의 사나이'로 불리어지게 된 첫 계기였다. 그 해 유상철은 국가대표로서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듯이 클럽팀인 울산에서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선수 신분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프로 첫시즌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유상철은 다음해인 1995년에는 홍콩국제대회나 다이너스티컵과 코리아컵 등 다수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축적하였고,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대표로 선정되며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와일드카드로 뽑히면서 1996년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올림픽 직전에 부상을 당하면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이 때 부상의 여파로 유상철은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밑바닥을 찍으면 다시 상한가로 돌아서듯이 그러한 부진을 유상철은 1996년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1대1로 비기고 있던 상황에서 역전골을 뽑아내면서 부진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고, 울산의 첫번째 챔피언 등극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이 때 고재욱 감독의 플랜에 유상철이란 존재는 필수요소였다).
1996년 첫 리그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후 이듬해인 1997년은 울산 구단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한 멤버진을 갖췄다(이당시 울산은 일명 '깡패축구'로 올드팬들에게 불리기도 했다). 김현석, 유상철, 김병지, 김종건, 황승주, 정정수, 김상훈, 박정배 등 울산 스쿼드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1996년 리그 우승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던 지, 1997년은 슬럼프에 빠졌다. 특히나 1996년에 속히 말해 '날라다녔던 신인 선수들'도 2년차 징크스에 대부분 빠져버린 셈이었다. 유상철은 부진한 것은 아니나 당시 팀의 분위기에 맞물려서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3.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유상철, 그리고 J리그 사기유닛시절(1998~2002)
(1998년은 유상철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연도 중 하나다. 프랑스월드컵에서 주장완장을 찼던 유상철)
1998년은 유상철을 대한민국을 대표로 하는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해였다. 이미 K리그 내에서는 나름 입지를 갖춘 미드필더이긴 했지만,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월드컵 대표팀으로 나서기 전에 열렸던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유상철은 주축선수로 활약하면서 팀의 컵대회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활약을 발판으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대표팀 주장완장을 차고 뛰었다. 특히나, 벨기에전에 유상철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골은 유상철이라는 선수를 전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경기이자, 유상철의 득점본능을 깨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그 전까지 유상철이 울산이나 국가대표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중원에서 조율을 전담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1998년 정규리그에서 생애 첫 득점왕을 차지한 유상철, 대체 그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1998년의 유상철은 내 뇌리 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고, 내가 울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유상철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수원에게 리그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의 활약상은 충분히 찬사받을만 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난 뒤, 유상철은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비수와 미드필더로만 뛰었던 그가 정규리그에서만 무려 14골을 뽑아내면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사실 그의 득점본능이 발휘되었던 것은 1997년 국가대표시절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1997년에 김현석에 이어 1998년에 유상철이 득점왕에 올라서면서 울산은 2년 연속 득점왕을 배출해낸 셈이다. 사실 유상철이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가 스트라이커로 포지션 변경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타고난 피지컬과 위치선정, 그리고 넓은 시야가 크게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유상철처럼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모두 뛰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는 이전에 김주성 밖에 없었고, 현재까진 없다.
하지만 유상철은 1998년을 끝으로 울산을 떠나게 되었다. 월드컵과 K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상의 영향인지 옆나라 일본 J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약은 여전했다, 아니 유상철은 속칭 "J리그를 씹어먹는 사기유닛"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J리그 선수들이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있어서 약점을 보이다보니 힘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에게 있어서는 J리그는 완전히 독무대였다. 요코하마로 가서 유상철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전 포지션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그러다 2000년에는 같은 울산 출신인 김현석과 더불어 J리그 득점왕 경쟁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의 J리그 활약은 길게 설명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2000년 유상철의 경기 기록 : 리그 22경기 출장 17골/리그컵 6경기 출장 4골). 그렇게 2001년에는 황선홍-홍명보가 있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면서 '코리안 3인방'을 결성하기도 했다.
(유상철의 바르셀로나행 이적설, 결국 성사되지 않았으나 이 당시 유상철의 주가가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J리그 활약 당시에 유상철에게 놀랄만한 오퍼가 들어왔다. 바로 스페인의 명문 클럽인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 당시 한국인 선수에게 유럽팀으로부터 오퍼가 들어온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며, 지금 시대에 비해 한국 선수들의 유럽에서의 인지도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상철의 바르샤행 링크 자체만 하더라도 크나큰 파장을 줬다. 사실 바르샤에서 관심을 가질 만 했던 것도 당시 유상철이 1998 FIFA 올스타팀에 선정될 정도 주가를 높이고 있던 터였는 데다가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를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이 주목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적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에이전트 및 기타 문제로 결렬되었다고 한다).
4. 2002년 월드컵의 진정한 히어로, 그리고 친정팀으로 금의환향(2002~2006)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유상철은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쓰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사진출처 KFA)
2001년, 한국 축구는 거스 히딩크라는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앉히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였다. 그가 오기 전에 한국 축구는 "축구강국들에 비해 기술이 떨어지고, 힘과 체력이 앞선다"라는 평이 많아서 브라질로 유학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울산이나 포항 등 몇몇 K리그 클럽들이 실제로 브라질 유학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오히려 "한국축구는 기술은 좋으나, 힘과 체력이 떨어진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하면서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놨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체력과 피지컬 강화 운동에 주력했다. 그 중심에는 유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호가 부침을 거듭하게 되자, 국가대표팀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되었고, 이에 맞물려 유상철도 한국 스타플레이어들이 통과의례로 치르던 안티지분을 대량 확보했다(정확하게는 유상철의 안티확보 근원은 2000년 허정무 감독시절, 그가 스트라이커로 뛸 때 숱한 1대1 찬스를 날려버린 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이후로 스트라이커 기용된 적이 없다며).
그렇다고 흔들릴 유상철은 아니었다. 히딩크호에서 유상철의 입지는 굳건했고, 일전에 히딩크가 홍명보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를 센터백으로 기용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지에는 별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2년 월드컵 당일, 유상철은 폴란드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을 꽂아넣으면서 한국대표팀에게 첫 월드컵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은 54년만에 월드컵 1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월드컵 기간 내내 줄곧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면서 김남일과 함께 중원에 포진되었다. 영국의 축구평론가인 앤드류 워쇼 UEFA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을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 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히딩크가 김태영-홍명보를 빼고 닥공모드를 시전할 당시에 최진철과 함께 최후방 수비를 맡으면서 이탈리아의 역습을 막아내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센츄리클럽에 가입했다.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유상철은 4년만에 울산으로 돌아왔다.)
월드컵 4강신화의 주축으로 주목받던 유상철은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에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시와 레이솔을 떠나 유럽 클럽팀들을 알아보고 있었으나, 자신의 에이전트의 무능력으로 인해 유럽 진출은 커녕 무적신세가 되면서 선수생활에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와중에,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유상철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팀이 있었으니, 바로 유상철의 친정팀인 울산이었다. 그리고 유상철이 복귀한 뒤에 처음으로 골을 터뜨린 경기가 재밌게도 지난 1998년 울산에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던 성남전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하여 이천수와 3골 합작하면서 침체된 울산의 순위를 끌어올리기 8연승을 달리며 2위로 리그를 마쳤다. 이정도면 상당히 성공적인 K리그 복귀였다. 다음 해인 2003년에 FA 자격으로 자유신분이 되었지만, 울산이 연봉 3억원에 격려금 2억원을 제시하면서 울산과 재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부산과의 경기에서 이장관이 유상철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걸었고, 이에 이성을 잃은 유상철은 이장관을 폭행하면서 5경기 출장정지와 82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유상철은 이 징계에 대해 "동업자 정신을 버린 축구에 대해 화가 났다"고 밝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J리그로 떠나버렸다.
자신이 J리그에서 처음으로 뛰었던 요코하마로 재이적한 유상철은 2003년 시즌 후반기에 17경기 출장 6골을 뽑아내면서 요코하마의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연봉 1억엔으로 계약하였다. 히딩크가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유상철은 여전히 국가대표팀의 중심이었다. 쿠엘류-박성화 감독체제를 거치면서 맏형 역할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일조하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와일드카드로 뽑혀서 어린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맡으며 올림픽 대표팀을 8강까지 견인하였다(올림픽 대표팀에선 플랫3에서 뛰었다). 요코하마가 2년 연속 리그 제패한 뒤에, 유상철은 방출되었다. 노장인데다가 2002년 이후로 계속 부상이 잦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던 와중에, 유상철은 다시 울산으로 복귀하길 결심하면서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유상철은 그렇게 많은 경기 수를 출장하지 못했다. 부상후유증과 노쇠화도 있지만, 유경렬-조세권 등의 주축 선수들이 자리를 잡은 터라 쉽사리 이들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상철은 조금 뒤로 물러나서 울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울산은 2005년에 리그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뛰면서 리그 우승 2번 모두 경험하는 울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뛰는 동안, 울산이 들어올린 2번의 리그 우승 현장에 모두 있었던 최초의 울산 선수가 되었다)
그 이후, 유상철은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릎이 허락하지 않았다(유상철의 왼쪽 무릎 부상이 호전되지 않았던 터였다). 결국 그는 2006년 K리그 울산 홈개막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뤘고, 후에 요코하마에서도 유상철의 은퇴경기를 기념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비' 유상철의 선수 경력은 마감하게 되었다. 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혔는데, 유상철은 선수로 뛸 당시에 왼쪽 눈이 실명상태라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로 경기를 뛰었다는 것을 고백했고, 이러한 사실은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부상을 숨긴 채, 그는 남모르는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 유상철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날아라 슛돌이 감독을 시작으로 춘천기계공업고 감독, 그리고 현재는 대전 감독으로 부임하여, 하위 스플릿에서 대전을 강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로지 울산에서만 뛰었던 '의리파 유비' 유상철, 그가 언젠가는 울산 감독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유상철같은 팀 레전드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울산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나, 팀 스피릿이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돌아와서 다시 호랑이들을 조련한다면, 울산이 깡패모드로 발돋움하는 것도 시간문제일텐데 말이다. 언젠가는 울산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유.상.철.
참고 : http://revofpla.hided.ip.ne.kr/wiki.php?key=%EC%9C%A0%EC%83%81%EC%B2%A0
http://en.wikipedia.org/wiki/Yoo_Sang-Chul
http://scrapboy.egloos.com/1635327
다 읽으시고, 밑에 있는 VIEW를 눌러서 추천해주시면 저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답니다. :)
'안방축구 > 호랑이의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격!' 울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뜨리는 글 (0) | 2012.11.09 |
---|---|
울산에게 수원전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0) | 2012.10.27 |
울산이 극복해야 할 문제 '이승렬 딜레마' (0) | 2012.09.13 |
지금 울산에게 필요한 것? 승리에 대한 절실함과 오늘 쓰러지겠다라는 의지 (0) | 2012.09.03 |
[Preview] 울산 vs 전북 :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둬야 할 시기 (0) | 201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