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隔世之感), 챔피언스리그에서 연이어 무너지는 이탈리아 클럽들
(2010년 이탈리아 클럽 대표로 인테르가 빅이어를 들었으나, 현재 세리에A 클럽들은 챔스에서 힘을 못쓰고 있다.)
21세기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할 당시,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는 이른바 '7공주 시대'라 불리면서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다. 어느 한 팀 가릴 것 없이 화려한 스쿼드와 단단한 조직력, 그리고 각 팀마다 개성있는 전술을 들고 나오면서 이탈리아 축구의 매력을 한껏 뽐내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세리에A 출신 클럽들은 챔스 빅이어를 3번이나 들어올렸고, 결승전 진출만 무려 4번이나 이뤘다. 2002/03 시즌에는 세리에A 클럽이자 명가인 AC밀란과 유벤투스가 결승전을 치뤘다. 그러한 이탈리아 클럽들의 활약을 기반으로 하여 2006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이 월드컵 우승을 일궈내기도 했다. 칼치오폴리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상당히 뒤숭숭하기도 했지만, 2010년 5월, 인테르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둘 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 클럽들은 여전히 건재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비록 유로 2012에선 이탈리아 대표팀이 준우승을 하는 등의 선전을 보여주긴 했으나, 이탈리아 클럽들의 사정은 영 좋지 못했다. 근 5년간 챔피언스리그 성적(2008/09 시즌 ~ 2012/13 시즌)을 토대로 했을 때, 2009/10 시즌 인테르가 빅이어를 들어올렸을 때를 제외하곤 8강진출도 간신히 이뤄낼 정도로 타리그와의 경쟁구도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세계적인 클럽들이라고 불리우는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최소 3번 이상의 8강 진출, 그리고 최소 2번 이상의 4강 진출을 보여주는 반면에, 인테르는 챔스 우승하던 시즌을 제외하곤 딱 1번의 8강 진출, 유벤투스와 AC밀란 또한 8강 진출을 딱 한 번 이뤄냈다. 수치로만 보았을 때, 세리에A 클럽들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지고 있었다.
특히나 이번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한 이탈리아 클럽들 중 AC밀란을 제외한 나머지 두 팀(유벤투스, 나폴리)은 아예 본선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변을 속출했다. 그 중에서 사람들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는 팀이 유벤투스인데, 유벤투스는 레전드인 안토니오 콘테가 감독으로 온 이후, 리그를 2년 연속으로 제패하고 현재 AS로마를 제치고 이번시즌에도 리그 단독선두로 달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만 나왔다하면 매번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팬들을 실망시켰다.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조에 속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한 수 아래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코펜하겐과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힘겹게 경기를 치뤘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분명 좋은 모습은 아니다(참고로 콘테의 리그 승률이 60% 이상을 넘는 데에 비해 챔스 승률은 40%도 채 되지 않는다). 지난시즌에도 극적으로 조별리그에서 본선 토너먼트로 진출했던 전례를 보았을 때, 분명 유벤투스의 최근 챔스 성적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나폴리는 제법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스날과 도르트문트과 승점이 같았고(12점), 유벤투스와 달리 해당 조에서 상당한 화력을 뿜어냈지만 결정적인 경기(이 조에서 순위는 마르세유전에서 갈렸다고 할 수 있다)에서 2% 아쉬움을 남기고 아깝게 떨어졌다. AC밀란은 16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긴 했지만, 실력보다는 다소 운이 따라준 케이스였다. 바르샤가 1위를 확정짓고, 아약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내부에서 삐걱거리면서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점만 보고 평가할 순 없지만, 최근 AC밀란이 이번시즌 리그에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챔스에서 보여주는 경기력이 평가절하 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다. 이미 EPL, 라리가, 분데스리가라는 중심에 밀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미 진행중인 이탈리아 클럽들의 유럽 변방화
이렇게 이탈리아 클럽들이 챔피언스리그에서 갑작스럽게 경쟁력이 뒤쳐지게 된 것은 아니다. 칼치오폴리 사건이 터져서 유벤투스가 강등수모를 겪고 AC밀란이 승점 삭감을 당하는 등 했으나, EPL이나 라리가에 뒤쳐지지 않고 분데스리가보단 다소 앞서는 상황이었다. 리그별 점수도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클럽들, 그리고 세리에A의 최근 행보를 보면 이미 그들은 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가고 있다. 이탈리아 클럽들의 경쟁력이 떨어진 이유는 크게 가지가 있다.
1. 재정이 빈약하여 머니싸움에서 밀려난 세리에A
(세계 경제 위기와 맞물려 이탈리아 클럽들의 재정도 자연스레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작년 여름에 세리에A 올스타를 수집하는 파리 생제르망을 통해서 보는 세리에A의 현실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세리에A의 현실을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 요 몇년간 유럽경제가 전반적으로 휘청거리면서 유럽 전역이 재정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는 특히 심각하게 경제위기를 겪고 있어서 여기서 구제할 방도가 도통 보일 기미가 없었다. 리그 외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이탈리아 클럽들도 위력적인 태풍을 피할 수가 없었던 셈이었다. 그렇기에 세리에A 클럽들은 자신들의 핵심선수들을 비싼 이적료에 팔아서 재정충당하는 등의 미봉책으로 해결하곤 하는데, PSG를 예로 들어 지난시즌 이적시장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티아구 실바, 에제키엘 라베찌, 제레미 메네즈, 하비에르 파스토레, 살바토레 시리구, 마르코 베라티, 티아고 모타, 이번시즌에는 에딘손 카바니와 마르퀴뇨스를 데려가면서 세리에A 출신 몇몇 클럽들이 두둑하게 이적료를 챙겼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이적료를 챙기지만, 빠져나간 만큼 공백을 메꾸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핵심선수들을 보낸 만큼 그에 알맞는 대체자를 찾아야하기 마련인데, 물량공세에서 EPL이나 분데스리가, 라리가 등에서 밀리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선수들을 데려오는 게 상당히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리그 내에서는 큰 표시는 나지 않지만,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세리에A 클럽들을 보면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짐싸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유망주 육성에 과감하게 투자해서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했어야했는데, 그들을 그러지 못했다. 그동안 타리그 빅클럽들이 이른바 '해적질'이라 불리우는 유망주 빼내기가 한동안 시행되었었고, 그러한 유망주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손만 빨고 지켜봐야만 했던 것 때문에 유망주 투자를 손 떼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유망주들이 자국리그보단 해외리그에서 뛰는 것을 선호하고, 해외 리그가 자국리그보다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기도 한다(주로 유망주들이 세리에A에서 로테이션급으로 기용되는 확률은 극히 드물다).
2. 유럽 무대에서 자존심이 꺾였던 세리에A 챔피언들의 수난
(지난시즌 챔스 8강에서 격돌한 유벤투스와 바이에른 뮌헨 전은 여러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2005/06 시즌부터 내리 리그 5연패를 거두며 신기록을 세우면서 스쿠테토를 차지했던 인테르였지만, 정작 무리뉴 시절에 딱 한 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올라서 우승을 차지했을 뿐(2009/10 시즌), 16강 문턱을 좀처럼 넘지 못했다. 챔피언이 AC밀란-유벤투스로 바뀌고 난 뒤에는 달라질 줄 알았으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AC밀란은 8강에서 바르셀로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고, 유벤투스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탈락했으며,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선 갈라타사라이에게 밀려 조 3위로 유로파리그 32강전에 참가하게 되는 등 수모를 겪었다. 특히나 지난 챔피언스리그 8강전이었던 유벤투스와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는 여러가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데스리가가 지금과 달리 암흑기를 거쳐가고 있을 때에도 바이에른 뮌헨은 보란듯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못해도 8강" 진출이라는 성적을 내면서 독일클럽의 자존심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현재 세리에A 암흑기(그만큼 세리에A 사정이 좋지 못한 건 사실이다)일 때, 이탈리아 클럽들은 바이에른처럼 하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유벤투스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했다. 1차전 2-0 패배, 2차전 2-0 패배, 도합 4-0 패배이자 완패나 다름없었다. 세리에A 내에선 3-5-2라는 새로운 전술을 개척하면서 신드롬을 불러온 안토니오 콘테였지만, 그는 바이에른 뮌헨처럼 속공과 돌파력이 좋은 팀들을 상대할 때 유연하게 대처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고집대로 3-5-2를 끌고 나갔다가 낭패를 보았다. 로벤-뮐러-만쥬키치-리베리를 상대로 쉴새없이 뒷공간을 내주었고, 발이 빠른 편이 아닌 유벤투스 수비수들이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레알 마드리드와 갈라타사라이와의 경기에서도 보여주었다(그래도 레알전은 나름대로 상대팀 전략에 맞춰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유벤투스 한 팀을 예시로 설명하기엔 다소 지나치게 단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세리에A 클럽들이 챔스에서 상대팀의 전술이나 추세를 파악하기보단 너무나도 자신들의 특성만 믿고 경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좀 더 유연화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a. 떨어져가는 관중 수, 그리고 경기장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고들
재정의 문제, 이에 맞물려서 낙후된 경기장의 보수가 어려워지고 있어 경기장 내 안전에도 취약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보니 관중 수에도 자연스레 미치게 되어 관중 수 또한 떨어져가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장 내 인종차별문제 및 상해사고 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지난 2012/13 시즌 유로파 리그 조별리그 중에 라치오 울트라스가 토트넘 팬을 상대로 살인미수를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가장 최근 사건으로 불리었던 2012/13 시즌 유로파 리그 조별리그 경기였던 라치오 vs 토트넘 경기에서 라치오 울트라스 팬들이 경기장 바깥에서 일부 토트넘 팬들을 몽둥이와 돌, 너클, 깨진 유리병 등으로 폭행하면서 살인미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다. 극우세력에 인종차별주의자로도 소문난 라치오 울트라스들은 토트넘 팬층이 주로 유태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같은 행동을 저질렀으며, 경기장 내부에서도 일부 토트넘 선수들(주로 유색인종)이 공 잡을 때마다 조롱하는 아유를 날리기도 했다. 이것은 리그 내에서도 지속되었다. 마리오 발로텔리의 경우, 일부 팬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해야만 했었고, 심지어 유벤투스를 비롯한 몇몇 서포터즈들은 나폴리 지역 사람들을 비하하는 서포팅곡을 부르면서 그들을 자극시켰다(심지어 나폴리와의 경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역차별, 인종차별 문제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세리에A에선 이를 제대로 통제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이런 식으로 변해갈수록 결국 손해를 입는 건 이탈리아 클럽들이다.
변방화가 가속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리에A가 다시 유럽 중심으로 돌아오기 위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분데스리가가 과거의 암흑기를 거쳐갔던 당시, 그들이 극복했던 방법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큰 영입을 할 수 없다면, 유스 투자에 보다 더 과감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자급자족식으로 선수를 수혈받을 수 있다면, 현재에 비해 다소 전력의 출혈이 반감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클럽들의 수익구조를 개선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경기장 당일 입장료에 의존하지 말고, 구단들의 기타 부대사업들을 늘린다던지, 스폰서 유치에 공격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이러한 전략은 타리그 빅클럽들이 주로 사용하며, 현재 그들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다). 추가적으로 전술 변화에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야할 필요가 있다. 타 리그 클럽들과의 경기에서 자신들만의 전술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유연성있게 대처할 수 있는 플랜B 또한 구축하고 있다면 챔스 같은 국제대회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잉글랜드, 스페인, 독일, 이제는 프랑스와의 경쟁력에서도 밀리기 시작하는 이탈리아 세리에A 클럽들. 언제부턴가 그들은 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중심이라 불리는 3개국 리그(EPL, 라리가, 분데스리가)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세리에A 클럽들은 이러한 격차를 그저 눈 뜨고 체념한 듯이 바라만 볼 것인가, 아니면 과거 분데스리가가 체질개선을 통하여 오늘날 부활했듯이 세리에A 또한 환골탈태를 할 것인가? 이 선택이 앞으로의 이탈리아 축구를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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