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뜨거웠던 9월 1일 상암 보조경기장
9월 1일 화요일, 이번 주부터 A매치 기간이었기에 이 날은 K리그 경기가 없었다. 어떠한 공식 경기도 없었는데, 서울 상암 보조경기장은 무려 3000여 명에 다다른 사람들이 찾았다. 이 날은 KBS 2TV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청춘 FC와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에서 창단 첫 해부터 돌풍을 일으켜 리그 3위를 달리고 있는 서울 이랜드 간의 비공식 친선경기가 열렸다. K리그를 휘저었던 이랜드와 달리 청춘 FC에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들이 한가득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 무명의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이 많은 인파를 보조경기장이 수용하지 못하니, 관객들은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들의 경기를 관전하였다. 관계자들은 1000명도 채우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들의 예상 밖으로 이 경기는 사람들의 관심대상이다.
(공식경기가 없던 9월 1일 오후 4시, 청춘 FC vs 서울 이랜드의 경기로 상암은 뜨거웠다)
비록 비주전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어도 서울 이랜드는 명실상부 프로팀이다. 그렇기에 '프로 vs 아마추어' 라는 객관적인 전력 차이는 당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 FC 선수들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이 서울 팀을 시종일관 괴롭혔고, 높은 집중력과 활동량을 선보이면서 그들이 마냥 TV에서 보여주었던 훈련과 벨기에 전지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경기 종료 후에 이 미생들의 경기력을 두고 많은 이들이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 그 중 챌린지 리그에서 득점왕 경쟁을 펼치고 있는 주민규는 "이들을 보면서 과거 험난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 말했고, 서울의 마틴 레니 감독 대신 이 날 경기를 이끌었던 김희호 수석코치는 "청춘 FC 선수들이 생각보다 몸을 잘 만들어 왔다.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고 그들을 칭찬했다.
주목받지 못한 '미생들에게 희망을', 청춘 FC
2014년 10월, 윤태호 작가의 인기 웹툰인 <미생(未生)>이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무려 10%대에 도달하였고, 한반도 전역에 크나큰 이슈를 만들었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직장인들의 사회 생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그것이 이제 막 사회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뛰어든 사회 초년생인 2,30대 미생들의 큰 공감대 형성을 이뤘다는 점이다. <미생>에서 보여주는 직장생활은 마치 회사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주목받지 못한 '미생들에게 다시 한 번 희망을' 주는 청춘 FC)
축구계는 회사 생활보다 더 냉혹하거나 생존 확률이 훨씬 더 줄어든다. 우리나라 축구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꾸준히 받거나 받아오던 선수들은 막상 세어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국내 최상위리그인 K리그 클래식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선수들은 5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까지 확장하여도 이러한 특권을 얻은 선수들은 1000명 이내에 포함되는 소위 '상위 5% 이내' 이자, 축구계의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위 계층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 상위 5%의 활약상만 매체 등을 통해 지켜보며, 나머지 하위 95%에 포함된 이들의 행방에 관심이 없다, 아니 조명되지 않기에 알 길이 없기에 그들은 우리에게서 거의 잊혀진 사람이 되어갔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가면서 축구화를 벗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촛불이 켜지고 있었으니, 바로 예능 프로 <청춘 FC 헝그리 일레븐(이하 청춘 FC)> 이었다.
대부분 <청춘 FC>를 시청하고 있는 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처음에 <청춘 FC>의 최재형 PD는 벨기에 AFC 투비즈를 인수한 스포티즌으로부터 투비즈 구단에 데려갈 선수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안받았다.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탈락과 합격이라는 오디션 포맷체제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주기 싫었고, 이미 사회에서 거의 보기 힘든 '세컨드 찬스(Second Chance)' 를 주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보니, 이 프로그램은 다시 한 번 청춘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프로그램 틀부터도 남달라야 했고, 휴먼 다큐멘터리나 외국의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많이 참고하면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타 예능 프로그램에서 흔히 삽입되는 웃음소리 더빙이나 코믹 코드도 웬만하면 많이 넣지 않았다. 자막 또한 간결하고 줄이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최종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일러스트를 띄우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러한 와중에 최재형 PD는 이 팀을 이끌 인물을 찾는 데에도 상당히 공들였는데, 그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안정환, 이을용, 이운재였다.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모를 큰 굴곡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지닌 안정환, 이을용, 그리고 이운재)
안정환, 이을용, 이운재... 우리는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꼽으라고 하면 '2002년 한국 대표팀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로만 기억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을 교집합으로 묶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모를 클 굴곡을 겪였다' 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귀공자 이미지와 달리, 안정환의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하루 하루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대를 거쳐 부산에 입단해 테리우스의 면모를 보여주기 전까지, 축구를 하는 이유가 단지 '굶지 않기 위해서' 였다. 안정환의 친구인 이을용 또한 가정형편이 어려워 강원의 명문고인 강릉상고를 졸업하고서도 1년 넘게 축구판을 벗어나 막노동과 나이트 등을 전전했었을 정도로 어렵게 축구를 했다. 이운재의 경우는 그나마 두 사람에 비해서 상당히 평탄한 선수생활을 했었으나, 나이 서른이 되어 2002년 월드컵 주전 골키퍼가 되기 전까지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는 2인자 신세였다.
안정환이 청춘 FC의 감독을 맡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후배들에게 또 한 번 아픔을 경험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청춘 FC 라는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축구에 다시 한 번 도전하여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는 일념과 다시 한 번 이 미생들을 순수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기회를 주기 위해 안정환은 자신에게 섭외 요청이 온 숱한 제의를 뿌리치고, 청춘 FC 감독직을 택한 셈이다. 어려운 유년시절부터 타고난 재능에 비해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경험해왔던 그였기에, 가슴 아픈 사연을 저마다 가지고 지원서를 넣어 재기를 노리는 유망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러한 안정환의 손길에, 20명의 '장그래'들은 땀으로 보답했다. 힘든 훈련을 견디어내면서 하나의 팀으로 완성되어갔고, 유럽 전지훈련에서도 귀중한 첫 승을 거두는 쾌거까지 이뤄냈다. 그렇기에 청춘 FC는 시청률과 관계없이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미생(未生)들이여,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날개를 펼치기를
(16부작 중 이제 반환점을 돈 청춘FC,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부디 날개를 접지 않기를)
현재 청춘 FC는 16부작으로 기획되었고, 8화까지 방영하면서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다. 아직 절반이 남긴 했지만, 시간은 금방 끝난다. 최재형 PD도 현재 청춘 FC 소속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이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선수생활을 계속 할 지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청춘 FC 선수들은 9월 1일 서울 이랜드와의 친선 경기를 치뤘고, 부끄럽지 않은 경기력을 펼치면서 상암 보조경기장을 찾아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제 그들은 국내에서 앞으로 남은 훈련을 계속하게 되는데,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면 1부 리그인 K리그 클래식의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그리고 K리그 최고 명문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성남 FC가 친선 경기를 제의했다는 점이다(친선 경기 날짜는 9월 16일 수요일, 탄천종합운동장이다). 물론 이 경기는 성남의 김학범 감독의 요청(그는 순수하게 경기만 치르자고 조건을 내걸었다)에 따라 TV에 방영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청춘 FC 선수들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호기가 될 수 있다. 2부 리그 팀을 넘어 1부 리그 팀과의 경기에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그동안 많은 굴곡으로 좌절을 겪었던 자신들에게 TV 프로그램이 아닌 또다른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 셈이다.
이전 임유철 감독의 작품인 <비상>과 <누구에게나 찬란한> 을 통하여, 축구계의 미생들을 집중조명하는 작품들은 존재했었고 사람들에게 잔잔한 파장을 주었다. <청춘 FC>는 잔잔함을 넘어 하나의 큰 파도를 형성하고 있고, TV라는 매체를 통해 평소 축구에 관심없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전달되고 있다. 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소외된 이들, 드렁큰 타이거의 노래 제목처럼 '모두 왼발 한 보 앞으로' 내딛고 접었던 날개를 펼치길 바란다.
참고 : "다시 뛰는 청춘을 통해 희망 말하고 싶다"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5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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