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 '더비(derby)' 란 무엇인가?
(스포츠에서 더비는 단순히 하나의 경기를 넘어 거대한 전쟁으로 스케일이 바뀐다.)
스포츠경기를 즐겨보다보면 우리는 '더비(derby)'라는 말을 듣게 되며, 라이벌팀끼리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 경기를 '더비'라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이 더비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뜻인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더비'는 보통 연고지가 같은 팀들이나 라이벌 의식이 있는 팀들이 대결하는 시합을 일컫는 단어인데, 이러한 더비의 어원에 관하여 몇가지 설이 있다. 19세기 중반,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 더비(Derby)에서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성 베드로 팀과 올 세인트 팀이 치열하게 축구경기를 벌인 것이 기원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잉글랜드 더비셔(Derbyshire)주 애쉬본에서 12세기에 시작된 'Royal Shrovetide Football Match'라는 이름의 대회가 모태가 되어 애쉬본 헨모어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북부 주민들과 남부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축구경기를 벌였다는 것이 더비가 되어 파생되었다는 또다른 설도 있다.
더비 경기의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같은 지역을 기반을 둔 경기일 때에는 로컬 더비, 한 나라를 대표하는 팀들 간의 경기가 있을 때에는 내셔널 더비라고 표현하곤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엘 클라시코(레알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나 데르비 이탈리아(유벤투스 vs 인테르), 이스탄불 더비(페네르바체 vs 갈라타사라이), 올드펌 더비(셀틱 vs 레인저스) 등 한 국가를 대표하는 더비가 내셔널 더비라 할 수 있겠으며, 로컬 더비로는 맨체스터 더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맨체스터 시티)나 북런던 더비(아스날 vs 토트넘), 데르비 델라 카피텔라(AS 로마 vs 라치오) 등이 로컬 더비의 예다(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스탄불 더비나 밀라노 더비 등은 로컬 더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더비는 비단 축구 경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흔히 사용되기도 하며, 야구나 럭비 등에서도 존재한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뉴욕 양키스 vs 보스턴 레드삭스가 대표적이며, 럭비의 경우에는 호주 vs 뉴질랜드가 유명한 더비경기로 손꼽힌다.
재밌는 사실은, 이 더비 경기가 단순히 스포츠 경기로만 평가할 수 없으며, 경기 외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맨유와 리버풀의 더비경기인 노스웨스트 더비의 경우에는 단순히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두 팀의 맞대결을 넘어 맨체스터와 리버풀 두 도시 간의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경쟁구도도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엘 클라시코의 경우, 과거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의 영향으로 바르셀로나가 탄압당하기도 했기에 정치적·사회적 요소까지 더해져서 경기가 다른 때보다 상당히 거칠어진다. 올드펌 더비의 경우에는 종교적 대립과 과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왕국의 대립했던 역사까지 더해져서 격함의 끝을 달린다. 그래서 더비가 있는 날에는 일종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더비가 있는 날에는 경기장 안이나 밖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경기에 몰입했던 감정이 경기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게 주요 원인이다. 문제를 일으켰던 경우가 많았다는 게 단점이자 문제점이긴 하지만, 더비 경기가 있음으로 인해 경기의 열기를 그 어느때보다도 몇 배로 가열시켜서 팬들의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자극하고, 최고의 흥행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장점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비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카드인 셈이다.
유럽 리그를 따라가기 위해 더비 만들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K리그 팬들
(K리그 내에서도 더비는 존재한다. 하지만 팬들은 유럽의 더비열기를 따라하고자, 지나치게 더비 만들기에 집착한다. 사진출처 스포츠조선)
한국 축구계에도 유명한 더비들이 많다. 중고등학교 축구리그부터 시작하자면, 강릉의 명물이라 불리우는 강릉 더비인 강릉 중앙고(舊 강릉농공고) vs 강릉 제일고(舊 강릉상고), 그리고 전통의 대학교 더비인 고연전 혹은 연고전(고려대와 연세대는 자신의 학교가 가장 앞글자에 붙는 것부터 자존심 싸움을 펼칠 정도)이 있다. 그렇다면, 30년이 넘은 K리그에서는 어떤가? 가장 오래된 더비로 불리우는 동해안 더비(울산 vs 포항)가 있고, 조광래 감독과 현재 수원 감독인 서정원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지지대 더비(수원 vs 안양)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치열하고 격렬하며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더비 경기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K리그, 아니 국내 축구계 안에서 갑작스럽게 많은 더비들이 생성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더비들은 언론이나 특정인물들, 혹은 일부 팬들이 하나하나 명명하여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모습들이 잡히고 있다. 언론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대표적인 더비가 바로 '현대家 더비(울산 vs 전북)' 과 '제철家 더비(포항 vs 전남)' 인데, 이들은 그저 같은 대기업을 뿌리로 두고 있을 뿐 그 어떠한 관계 그 이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경기가 있을 때 유독 기업 명칭을 붙여서 더비로 묶어 표현하려는 언론들의 시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인물로 인해서 생성되고 있는 대표적 관계는 바로 '호남 더비(전북 vs 전남)' 나, 그리고 얼마전에 일종의 내기형식으로 치뤄진 성남과 수원FC, K리그 챌린지에선 안양과 안산의 대결구도였다. 하나의 이벤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기나 협약 등을 지자체장들이 내세워 분위기를 띄우고 더 많은 이야기거리를 제공해 리그의 열기를 더해가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모습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유럽 리그를 따라하기 위해 어설프게 포장하여 더비라 일컫으며 특정 경기를 띄우거나 띄우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없다. 그건 더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분과 역사가 없다.
('더비' 란 단어는 애초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가 없다. '더비' 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나 다름없다)
더비가 어떤 개념인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옛날 유럽여행을 하다가 경험했었던 사례를 들겠다. 이스탄불 여행 중에 시간이 되어서 페네르바체의 홈경기장인 쉬크리 사라졸루 스타디움을 들렸고 페네르바체의 기념품을 하나 구매하고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마침, 페네르바체의 철천지원수인 갈라타사라이 울트라스 팬으로 추정되는 터키 남성 두 명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적진을 활보하며 그들을 자극하는 서포팅곡을 온동네 떠나갈 정도로 소리치고 다녔다. 갈라타사라이 팬들은 주로 시슬리나 자신들의 홈구장인 튀르크 텔레콤 아레나 근방인 알리베이쿄이에 운집하고 있는데, 프리시즌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페네르바체 팬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카디쿄이까지 굳이 쳐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때아닌 도발을 듣게 된 페네르바체 일부 팬들은 자신들의 구역에 쳐들어온 이 불청객들에게 욕설처럼 느껴지는 문장으로 그들에게 소리치면서 쫓아냈었다. 이것이 전세계에서 난폭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더비 중 하나인 이스탄불 더비의 흔한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더비' 는 호전적이기 보다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아름답고 훈훈한 방식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울산과 포항이 동해안 더비로 격렬하게 치고박고 싸우는 것을 보고, 호남에도 이와 비슷한 흥행카드를 만들기 위해 아무런 관계없는 전북과 전남이 협약을 통해 더비를 만들고, 성남과 수원FC 처럼 구단주인 시장이 직접 나서서 깃발 내기로 언론플레이하며 단지 같은 모기업이라고 하여 억지로 엮어버리는 등 어떻게든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서 더비, 라이벌전을 생성하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K리그 내 더비들의 목록을 발견하게 되는데, 과연 이것이 '더비' 라는 개념과 방향에 걸맞는 것일까? 단기간 홍보효과에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장기적 관점에선 '더비' 가 될 수 없다. 단적으로 2009년에 더비로 합의본 호남더비의 경우, 7년이 지난 지금은 언론에서 굳이 '호남 더비' 명명하여 겨우살이하고 있지 양 팀 서포터즈들은 더비는 커녕 이러한 과거를 민망해하고 있다. 전북과 전남은 그저 같은 전라도에 연고지를 둔 팀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말이다. 이러한 '호남 더비' 같은 '더비' 라고 말하기 민망한 패키지가 너무나도 많다.
자고로 '더비', 좀 더 넓은 범위로 '라이벌전' 이라고 하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요소가 바로 '상대를 향한 증오심' 이다. 예를 들어, 울산과 포항의 팬들은 서로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다. 팀의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기본적으로 '쟤한테 지면 그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은 없다.' 라는 마인드가 깔려있으며, 2013년 K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격돌한 동해안 더비 내에서 수많은 논란거리가 나왔던 것도 이 두 팀이 상대를 향한 증오심이 한 경기에서 화산폭발처럼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 '더비' 처럼 그럴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수원더비인데, K리그 최초 같은 연고지 간의 경기라는 의미보다도 이 경기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 바로 수원시장인 염태영씨의 상반된 태도였다. 2부에서 승격한 수원FC에 대해선 상당히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반면, 수원FC가 프로팀으로 합류하기 이전부터 수원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았던 수원 블루윙즈는 최근 염 시장으로부터 홀대와 푸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과 수원 서포터즈를 격분하게 했던 립서비스가 그들의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었다. 이러한 뒷배경이 있었기에 얼마 전에 있었던 수원 더비가 생각 이상의 열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인위적인 '더비', '라이벌' 구도 만들기보다 더 중요한 건 경기의 질 향상이다.
(더비는 3분 카레처럼 금방 완성되는 인스턴트 음식이 아닌, 오랜 갈등의 역사가 누적되어 탄생하는 발효식품과 같다. 사진출처 인터풋볼)
지금까지 이 글을 읽는다면, '더비' 를 위해서 서로가 으르렁대고 싸우라는 말로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굳이 더비나 라이벌 구도를 인위적으로 생성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경기를 보라' 이다. 전세계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더비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K리그 내에서 발생되는 더비들과 달리 계층, 종교, 지역적 갈등으로 시작된 다툼과 분쟁이 오랜 역사를 거쳐 나타는 일종의 전쟁과도 같다. 단순히 팬덤을 만들고 리그 발전을 위해 문어발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누군가가 직접 나서서 일회성 이벤트로 이목을 끄는 것을 해외에선 '더비' 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모 사이트에서 정리해놓은 K리그 더비 / 매치 목록을 보고 있자면 불필요한 정리이다.
오히려 지금 국내 축구에 필요한 것은 경기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요즘 K리그 내에서 논란이 되어오고 있는 것이 간혹 납득하기 힘든 판정을 내리는 심판들의 행동이다. 되려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경기흐름을 끊고, 타오를 것 같은 경기에 찬물을 끼얹어 경기 외적인 논란거리를 만들고 있으며,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주목해야한다. 물론,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팀들의 역량 강화도 리그 존속 및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K리그에 필요한 것은 어줍잖은 연결고리를 형성하여 민망한 더비를 엮기 보다는 한 경기 한 경기에 팬들에게 잊지 못할 경기로 각인시켜주는 것이 우선이다. 관계 형성은 그 후에 나타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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